- 글감이 없을 때 할 수 있는 방법 -
[새가 산 너머로 날아간다. 어스름이 깔리기 전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며 놀이 사방으로 퍼진다. 논에는 벼 이삭이 영글어 고개를 숙이고 있다. 밭에는 감자, 파, 무, 마늘, 양파, 부추, 오이 등이 자라고 있다. 외양간에는 소가 음메~ 음메~ 하며 여물을 먹고 있다. 뒷칸에는 토끼가 새끼를 낳아서 검은 천으로 가려져 있다.
옆 집 할머니가 바구니에 감을 담아 주신다. 엄마는 시장에서 사 온 "김"을 드리며 인사한다. 아궁이에 걸쳐있는 가마솥에는 밥이 뜸을 들이며 냄새를 풍기고 있다. 가마솥 안에는 깎아 넣은 밤과 고구마가 같이 삶아지고 있다. 엄마는 활짝 타고 있는 장작을 밖으로 꺼내어 불을 조절한다.
냄새가 밖에서 놀고 있는 내 코에 닿는다. 순간 입 안에 침이 고인다. 공기놀이로 가져온 냇가 돌을 치운다. 흙이 잔뜩 묻은 동생에게 말뚝박이 그만하고, 씻고 오라고 한다. 동생이 말을 듣지 않자, 등 짝을 때리고 싶지만 귀를 잡아 펌프가 있는 우물가로 데리고 간다. 숨도 못 쉴 정도로 아프다며 엄살을 부린다. 대충 씻은 얼굴에 때 국물이 흐른다. 다시 씻으라고 하니, 그제야 한참 씻는다. 맑개진 얼굴로 씩 웃는다.
할머니 집과 우리 집 사이에 작은 틈이 있다. 그 틈 사이로 풀이 자란다. 제법 잎이 무성하게 자라 내 눈에도 낫으로 베어서 정리해야 할 것을 보인다. 쑥이랑 민들레다. 정말 쑥쑥 큰다. 할머니 집 창호지 문 사이에 구멍이 있다. 바람이 넘나 든다. 아버지가 혹여 밤에 찬 공기가 들어갈까 봐 다시 풀을 먹인 종이로 덧댄다. 할머니 얼굴에 웃음꽃이 핀다. 아버지 손을 잡으며 오래 건강하게 살라고 한다. 술은 그만 마시라는 사랑이 듬뿍 담긴 말도 잊지 않으신다.
시골에서 하나 있는 약국을 운영하는 우리 집에 사색이 된 손님이 오신다. 누군가 칼에 베어 피가 흐르는데 막을 방법이 없다고 한다. 차려진 밥상을 뒤로하고, 칼, 바늘, 실, 가루약, 연고 등 약상자를 챙겨서 옷을 대충 입으시고 나가신다. 엄마는 밥을 듬뿍 담아 뚜껑을 덮어 이불 밑에 넣어 둔다. 오늘은 강낭콩 밥이다. 아버지가 오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금방 오시니 기다리라며, 대신 익은 고구마와 밤을 내어 주신다.
창 밖에는 달이 떠 있다. 새벽에 울던 닭은 더 이상 요란하게 울지 않는다. 개가 짖는다. 컹컹, 그러면 건너편 마을에 사는 단짝 친구 집 염소가 음메 한다. 아버지를 기다리며 벽에 있는 시계를 쳐다본다. 1시간이 넘었다. 졸리다. 잠이 오기 시작한다. 자지 않으려고 얼굴을 꼬집어 본다. 아프다. 불이 켜진 초 심지가 바람에 이리저리 움직이며 벽에 나타난 그림자를 만화처럼 본다. 그래도 안 오신다. 책을 꺼낸다. 강에서 물고기를 잡은 할아버지 어부가 불쌍해서 놓아주었는데, 그 물고기가 용왕이었다는 내용이다. 착한 일을 해야 하는구나 마음이 들었다. 언니는 요즘 먹을 갈고 붓을 들어 글씨를 쓰고 있다. 천자문이다. 무슨 글자인지 모르지만, 그림 같다.
드디어 문 소리가 난다. 신발 벗는 소리도 난다. 아버지다. 밥을 먹을 수 있다. 아버지는 옷을 벗으며, 벽에 걸린 못에 걸어두시고, 씻으러 가신다. 밥 먹기 힘들다. 덮여 놓은 밥상보를 걷자, 갈치조림, 된장국, 파김치, 깍두기 등이 손짓한다. 힘껏 입을 벌려 먹기 시작한다. 배가 부르다. 마지막으로 가마솥에 푹 끓인 숭늉과 보리 끓인 물이 나온다. 아버지는 숭늉을, 우리는 보리차를 마신다. 다친 분은 상처가 잘 꿰며져 칠일만 지나면 된다고 한다. 온 동네에 유일하게 꿰매 줄 수 있는 약사인 아버지가 대단해 보인다. 술 드시고 "노세, 노세" 춤만 안 추시면 좋을 텐데....
이제 밤하늘에는 별이 총총하다. 쏟아져서 아버지 눈에 박힌 것 같다. 오늘따라 아버지 눈이 맑다. 아마 좋은 일을 하셔서 그런가 보다. 난 그 별 하나 품고 잠에 든다. 꿈속에서도 아버지의 별을 따라 어디론가 여행을 할 것 같다.
1)한 글자에 온 세상이 다 들어 있었네 - 오마이뉴스 (ohmynews.com)
2)[삶과 문화] 당신의 한 글자는? (hankookilbo.com)
국어학자들은 아름답게 들리는 우리말은 대체로 유성음인 ‘ㄴ’, ‘ㄹ’, ‘ㅁ’, ‘ㅇ’이 들어간 게 많다고 말한다. 부드러운 울림과 소리의 잔류감이 좋다. 마찰음이자 치조음인 ‘ㅅ’도 싱그럽고 솟아오르는 어감이 좋다고 한다. ‘사랑’은 그런 자음들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