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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맘 Dec 24. 2020

글쓰기는 내 존재의 이유를 밝히는 작업이다.

- 그래서 난 오늘도 쓴다 -

어떤 장소에서도 글 쓰기는 가능하다.  마음만 있으면 된다. 


난 일기도 쓰지 않는다.  

메모조차 하지 않는다. 

런 내가 꾸준하게 하고 있는 것이 '글쓰기'다. 


글을 쓰게 된 동기는 동네 작은 도서관에서 열린 "나의 첫 동화책"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나서다.  6명 정도 모여, 이지현 동화작가를 만나 동화를 쓰기 시작했다. '옆집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라는 동화책을 내신 분이라 꼼꼼하게 수강생이 쓴 글을 체크해주었다. 처음 쓴 "놀이터 노란수박" 동화를 보내고 며칠 후 선생님이 빨간펜으로 하나하나 지적해주신 글을 보며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놀이터에서 우연하게 발견한 노란색 수박을 보고, 동호라는 아이가 친구들과 수박주인을 찾는 와중에 그 수박이 없어진 것을 알고 벌어지는 이야기를 쓴 동화다.  A4가 거의 빨간색 물결로 넘쳐 까만 글씨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내가 한국인임에도 한국어를 잘 모르는 외국인"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한 동안 그 피드백을 읽지 않았다. 그러다 꼼꼼하게 보기 시작했다.  알랑한 자존심때문에 여기서 포기할 경우 다시는 글을 쓰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 몇가지 이야기가 중첩되어 있어요. 작가의 욕심이 그 만큼 많은 거 겠지요. 하지만 동화는 아이들이 읽는 것을 전제로 하는 거니깐 이야기가 복잡해지면 아이들의 흥미를 끝까지 끌고 가기 힘들어요.'

'주인공이 누구인가요'

'중심사건이 무엇인가요'

이 부분이 명확해지면 이것을 중심 축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불필로한 부분은 과감히 버리세요.

'동호와 할머니가 놀이터에서 덩굴을 발견하고 수박이 크게 자라기까지 정성껏 키우는 이야기인지요?

놀이터에서 발견된 수박은 누가 심은 것인지요?, 심은 사람을 찾아내는 이야기인지요? 등 중심이야기를 찾아낼 수 가 없어요.' 등등 선생님이 지적은 하나 부터 열까지 구구절절 옳았다. 


심하게 지적하셨다고 판단하셨는지, 위로의 말씀도 곁들어 주셨다.

'사실 처음부터 줄기를 잡아 풀어가는 건 힘들어요. 이렇게 생각한 것을 풀어 써 놓고 차츰 차츰 가닥을 잡아 나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것 같아요. 3주 만에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쓰시다니, 참 대단하세요. 직장맘으로 시간도 많지 않았을텐데.'라며 토닥이는 글도 남겨주셨다.

한밤중 아이들을 재워놓고 책상에 앉아 한 숨을 내쉬었다. 책을 많이 읽지도 않았고, 글을 써본 적도 없는 내가 과연 2주 후에 제대로 된 동화를 완성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주말이면 상상 속 인물들을 등장시켰다 공중으로 날려보내기도 하고, 노란수박 안에 지니 같은 요술쟁이가 나오는 상상도 해보았다. 시험에 낙방하고 며칠동안 울다 지쳐 겨우 밥 숟가락을 드는 사람처럼 난 그렇게 간신히 '놀이터 노란수박'에서 "흔한 수박주인을 찾습니다"라는 제목으로 수정하여 마무리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기'가 발동되었다. '포기'보다는 한 번 더 해보자는 도전 의식이  아이를 키우면서 쌓인거 같다. 아이들이 실수했을 때 두 번, 세 번 기회를 주지 않으면 그 아이는 혼자 힘으로 설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터득했기 때문인거 같다. 옆에서 몇 번이고 지켜보고 스스로 일어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현명함을 몸으로 느끼고 있었던 터라,  동화 공모전에 출품해보기로 결심했다. 우연히 '제 1회 CCBOOK  공모전'에서 동화를 공모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부상이 전자책 출간이었다. 이후 출퇴근시간, 주말시간  등 짬 날 때마다 동화를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동화가 " 걱정인형아, 걱정마"이다. 응모만 해보기로 하고 출품했는데, 최우수상을 받고 전자북으로 출간되었다. 


수상이후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다. 식사대접을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선생님은 무엇보다도 내가 공모전에 동화부문으로 수상했다는 것에 놀라워하셨다. 전화를 받으시고 3초간 침묵의 정적이 흘렸다. 그도 그럴것이 수강생 중에 경험도, 글쓰기 능력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걸 나도 알고 있었다. 선생님이 식사하시면서, "꾸준하게 쓰는 게 제일 큰 비결"이라며 이왕 시작한거 신춘문예에도 도전해보라고 격려해주셨다. 그리고 자신이 쓴 "옆집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를 선물로 주셨다. 지금도 이 책을 보면 선생님의 빨간색 피드백이 눈앞에 나타나기도 한다. 

남들에겐 사소할지 모르지만 나에게 큰 성공의 경험덕분인지, 난 펜을 들고 쓰기 시작했다. 공책이나 네이버 개인카페에  일상생활 속에서 느낀 것들을 적기 시작하였다. 뭔가를 적다보니 출퇴근할 때 걸어다니는 산책길에서, 스쳐지나가는 사람들 속에서, 그리고 계절마다 바뀌는 풍경속에서 세밀하게 관찰하는 습관이 생기기 시작했다. 자주 보다보니 내가 알고 있는 풍경이 아니었다. 그때 그때 감정파동에 따라 풍경이 달라보이는 것을 느꼈다. 습작 횟수가 증가할 수록 내 안에 켜켜이 쌓인 감정과 생각의 무덤이 봉인해제하고 나오기 시작하였다. 폭풍처럼 왔다 갈 때도 있고, 솔바람 처럼 부드럽게 위로해줄 때도 있고, 먹구럼처럼 잔뜩 찌푸리게 하다가 결국 눈에서 눈물이 나게 할 때도 있었다. 

연필이 서걱서걱 거리며 종이위에 마찰음을 낼때, 그때 내안에서 울림이 나온다. 지금 당장 펜을 잡아라!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로 시작하는 노래처럼 난 내가 모르는 나를 만날때마다 실망할 때도 있었다. 내가 상상하는 모습과는 확연하게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남들 눈에 근사하게 보이고 싶지만, 실상은 우왕좌앙 실수투성임을 자각하게 되었다. 신기하게도 나에 대해 쓴 글이 아님에도 글 속에서 나의 또다른 자아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낯설고 인정하기 싫었지만, 이제는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이쁘게 봐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고 예쁘게 보고 있다.  


오늘도 글쓰기를 하고 있다. 

글쓰는 시간 동안 차마 치우지 못한 나의 잔재들을 고백하고 애도의 묵념을 한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이 아니라, 내 자신을 들여다보는 글을 쓰고 있다.  내 안에서 진심으로 울리는 글을 옮겨 적기 위해, 내 안에 묻혀있는 '나의 말'을 찾아 내고 있다. 


"오늘도 난 나를 울리고 있다."



주석**: 옆집에 누가 이사를 왔군요. 분명 이사를 왔는데, 누가 살고 있는 것 같은데 꼬꼬닭은 이상하게 통 얼굴을 볼 수 없었어요. 점차 옆집에 이사 온 이를 의심하게 되고, 외출할 때는 자물쇠로 현관문을 채우고 다니는군요. 도대체 옆집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요? 꼬꼬닭이 생각한 계획들을 살짝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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