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cia의 정체성 지위 이론
대학 4학년 때 교육심리학 강의에서 처음 접한 '정체성(identity)'이라는 개념, 그중에서도 캐나다 심리학자 마르시아(Marcia)가 제시한 '정체성 지위(identity status)' 이론에 푹 빠지게 되었다. 이 모델은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의 정체성도 분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을 느꼈다.
(지위(status)는 '상태'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즉, 현재 나의 정체성 발달 상태를 의미한다)
나를 정체성의 세계로 이끌어 준 마르시아의 이론을 소개하고자 한다.
마르시아의 정체성 지위 이론은 사람의 정체성이 어느 정도 발달되어 있는지 분류하는 데 목적이 있다. 1966년에 처음 제시되었으며, 지금까지도 연구자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마르시아는 정체성 발달 정도를 분류하기 위해 두 가지 핵심 과정을 제시하였다.
두 가지 과정은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한 과정이다.
1. 탐색(exploration)
탐색은 자기 자신을 이루는 여러 요소 즉, 가치관, 삶의 목표, 직업 등을 열심히 찾고 시도해 보는 과정이다. 일례로 '나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 될 거야'라는 내 인생의 가치관이 맞는지 검증하기 위해 여러 직업을 조사해 보는 등의 과정이 있을 수 있겠다.
2. 관여(commitment)
관여는 탐색의 결과, 확고한 가치관과 삶의 목표, 직업 등을 정하는 과정이다. 관여가 높은 사람은 자신이 선택한 직업, 가치관 등에 높은 자신감을 갖는다고 한다. 예로, 하나의 특정 직업을 선택하고, 나아가 직업을 통해 삶의 의미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두 과정의 수준에 따라 정체성 지위를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1. 성취(achievement): 스스로 정체성을 확립한 사람들
탐색과 관여가 모두 높다. 이른바 확고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상태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 열심히 생각해 보고 조사하여, 특정 가치관과 삶의 목표 등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에 대해 높은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이러한 것을 내 주변의 사람들도 인정을 해준다.
2. 조기완료(foreclosure): 타인의 의견에 기반해 정체성을 확립한 사람들
관여는 높지만 탐색이 낮다. 이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 충분히 생각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한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부모의 요구에 그대로 따라 특정 직업을 선택한 것이다.
부모가 의사와 같은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의 전문직을 가진 경우에는 자식도 그 수순을 밟을 가능성이 높다. 어릴 때부터 부모의 행동이나 가치관 등이 그대로 주입되고, 청년기에 이르러서도 그것이 유지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원래는 중~고등학생에 이르러서는 자신이 형성해 온 '나 자신'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과정을 거치는 게 자연스러운데, 조기완료 상태의 청소년은 아동기까지 형성해 온 자기 자신을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자신의 것이라 생각하고 유지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탐색 과정을 통해 확립되는 정체성이 가장 '건강하고 바람직한 것'이라 알려져 있지만, 많은 연구에서 조기완료의 사람들 또한 양호한 정신적 건강이나 높은 자존감 등이 보고되었다. 어쩌면 '높은 관여(특정선택)'자체에서 만족감이나 정신적 건강이 야기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피상적인 만족감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3. 유예(moratorium): 정체성을 탐색하고 있는 사람들
조기완료와는 반대로 관여는 낮지만 탐색은 높다. 이는 전형적인 청소년의 정체성 발달 상태를 뜻한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 여러 가치관과 삶의 목표를 탐색하는 것이다. 아직 확고한 자기 자신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불안하고 불안정한 상태이지만 '건강한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여기서 모라토리움이란 용어는 청소년이 정체성을 확립할 때까지 사회에서 노동을 유예해 준다는 용어이다. 전 세계에서 실시되고 있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의 의미 교육은 청소년이 자기 자신과 타인, 그리고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세계에 대해 배우고 탐색하며 사회 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규명하기 위해, 사회에서 공식적으로 유예를 인정한 시기이다.
하지만 이론과는 달리 오늘날의 젊은이들, 특히 성인 초기의 대학생부터 20대 후반, 심지어 30대 초반까지 유예기가 연장되고 있는 것 같다. 1950~60년대에 정체성 이론이 만들어졌을 때는 시대의 흐름이 비교적 느렸다. 하지만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현대 사회는 너무나 빠르게 변화하고 정보도 흘러넘친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청소년기에 정보를 탐색하고 확고한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은 이제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현대의 정체성 학자들이 조사한 결과, 청소년기에 정체성을 확립한 비율은 절반도 채 안된다고 한다. 따라서 유예기는 이제 청소년기만의 유물이 아니라 할 수 있다.
4. 확산(diffusion): 정체성 형성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 혼란스러운 사람들
연기처럼 정체성이 뿔뿔이 흩어져 있는 발달상 태이다. 탐색과 관여 수준이 모두 낮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탐색하지도 않으며 그에 대한 선택도 하고 있지 않다. 예상하는 바와 같이 정체성 연구에서는 확산을 '문제가 있는 발달상태'라고 본다. 연구에서 흔히 드는 예는 비행청소년인데, 이게 올바른 예시인지는 잘 모르겠다. 개개인을 자세하게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 비행청소년의 정체성을 오로지 '나쁘다'거나 '발달되지 않은 상태'라고 단정 짓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어쨌건 연구자들은 정체성 발달의 시작점을 확산 상태라고 본다.
1990년대 말, 마르시아의 정체성 지위 이론이 수정되었다. 그 이유는 1960년대에 처음 이론이 제시된 이후, 30여 년 동안 연구를 해보니 정체성을 확립했더라도 다시 정체성을 탐색하는 단계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MAMA는 Moratorium-Achievement-Moratorium-Achievement(유예-성취-유예-성취)의 약자로, 정체성 발달이 한 번 확립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지속적인 수정을 거치는 것을 통한 순환적인 과정인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직업을 선택해서 그 직장에 들어간다 하더라도(성취 지위), 코로나19나 세계 경제위기와 같은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고, 삶의 가치관의 변화로 인해 퇴사를 고려하게 될 수 있다. 이 경우, 우리는 다시 새로운 직업을 찾아야 할 것이다(유예 지위). 새로운 직업을 찾고 이직을 해서 만족한 삶을 누리면 다시 성취 지위로 이동할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생애 동안 정체성을 형성하고 재형성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마지막에 제시한 MAMA 모형은 2000년대 이후 정체성 지위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대표적인 이론으로 자리 잡았다. 즉, 우리의 정체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장한다는 것을 전제로 연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현대 사회에서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고, 직업 세계가 변화하고, 사회적 가치가 변동하는 등의 변화로 인해 우리는 끊임없이 정체성을 재고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 '정체성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이며,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과정이다.
*그림 출처
1) https://socioemotional.weebly.com/james-marcia.html
2) https://ystudios.com/insights-people/influence-on-ident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