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걸까 나쁜 걸까?
우리나라에서는 타인이 제시한 길을 걷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예를 들면, 부모가 교사를 추천하면 스스럼없이 교사의 길을 걷거나, 사회에서 공무원이나 공기업이 유행하면 자연스럽게 그 길을 걸으려 하는 등..
위에서 언급한 '타인'이라는 건 비단 부모, 교사 등 사람뿐만 아닌 큰 맥락에서 사회도 포함된다. 즉, 내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진로에 대한 선택지를 제시하는 것이다.
이렇게 다른 존재가 제시하는 진로를 선택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정체성 학자인 마샤(Marcia)는 타인이 제시한 길을 걷는 사람들을 조기완료(foreclosure) 상태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조기완료는 자기 자신과 진로에 대해 정보를 모으고 여러 선택지와 비교해 보는 탐색 과정 없이 특정한 진로에 몰입하는(선택한) 사람들을 말한다. 탐색 과정 없이 조기에 진로를 선택한 것이다.
이론 상으로 보면 이들은 정체성 발달 수준이 비교적 낮은 상태에 해당한다. 왜냐면 정체성 이론을 제시한 에릭슨(Erikson)은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탐색 과정이 필수라 제시했기 때문이다. 탐색은 다양한 것을 시도해 보는 '시행착오'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에, 진로를 선택하기 전에 내가 과연 이 길을 걷는 것이 맞는지 심사숙고하는 절차를 밟도록 한다.
서구권에서 조기완료는 건강하지 못한 상태인 것으로 제시되어 왔다. 특정한 진로를 선택했다는 것은 처음에는 안정감을 줄 수는 있지만, 탐색 과정의 결여로 인해 결국에는 다른 선택지를 찾아 나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대다수 연구에서 조기완료는 탐색 과정을 거치고 진로를 선택한 '성취' 상태와 맞먹을 정도로 건강한 특성(예로, 우울과 불안이 낮고 자아존중감이 높은 것)을 지닌 것으로 드러났다. 성취 상태는 가장 이상적인 상태로서 청년들이 지향해야 할 지점이기도 한데, 조기완료는 탐색 과정이 없는데도 성취만큼이나 건강하다는 것은 서양과는 다른 특징을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에서 조기완료가 건강한 상태인 것을 뒷받침하는 근거 중 하나는 '집단주의' 문화이다. 타인의 눈치를 살피고 집단에 의견에 따르며 부모의 기대가 진로 결정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기에, 내가 스스로 진로를 탐색하지 않고 다른 누군가가 제시하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 서양에 비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것이다.
서양은 개인주의 문화가 진로에서도 어김없이 큰 영향을 미치며, '스스로' 내 길을 개척해 나가는 것이 올바른 삶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탐색을 하지 않고 진로를 선택하는 것은 서양 문화권의 연구자가 보기에는 올바르지 않은 것이며, 이러한 인식은 서양의 대중에게도 퍼져 있어 결국 조기완료는 건강하지 않은 결과로 나타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탐색을 하지 않고 특정한 진로를 선택한다는 것은 문화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물론, 탐색 과정이 결여된 것은 나의 길을 찾는 과정이 생략된 것이기에 바람직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널리 받아들여지는 특성이라 할 수 있다.
요즘 생각하는 것은 조기완료 상태라 할지라도, 타의에 의해 선택한 진로를 심사숙고하는 과정을 통해 그 진로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이다. 어떠한 과정을 통해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지 내가 알기론 밝혀진 바가 없다. 하지만, 조기완료의 사람들이 심리적으로 안정된 상태를 보인다는 것은 탐색이 결여되었을지언정 그 이상의 만족감을 느끼는 것일 수 있다. 이러한 만족감을 기반으로 나 자신을 진로에 투영하는 과정이 이들에겐 필요할 수도 있다. 즉,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이해하고, 이러한 자기 이해를 바탕으로 현재 몰입하고 있는 진로를 나와 연결해 보는 것이다. 연결점을 발견한다면 더 안정된 상태로 나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일하지도 않고 취업을 준비하지도 않는 '그냥 쉬었음' 청년 인구가 역대 최대라고 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보면 조기완료는 사회인으로서 첫 시작을 하도록 하는 방안일 수 있다. 내가 스스로 탐색하진 않았더라도 일단 그 일을 해보는 것이다. 일단 무언가를 시작하는 건 새로운 경험과 새로운 기회를 얻는 시작점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