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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이 만든 나

우연과 정체성

by 김용희

나는 학부 시절 일문학을 전공했다.

내가 심리학을 만나게 된 건 예상치 못한 사건에 의해서였다.


학부 3학년 때, 1년 간 일본에서 교환학생을 했었다.

교환학생 시절은 내 생을 통틀어 가장 즐거운 한 때였다.

일본에서 살아본다는 느낌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주위 사람들이 좋았다.

함께 놀러 다니고 수업도 함께 들으며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그렇게 약 1년의 시간을 보냈다.


겨울방학을 맞이하고 한국에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였다.

나는 문득 학교 도서관을 가보고 싶어졌다.

그토록 관심이 없던 도서관에 들어가서 별생각 없이 걸어 다니며 책장에 진열된 책들을 보았다.


그 순간, 눈에 띄는 책이 하나 있었다.

'임상심리학 개론'이라는 책이었다.

나는 임상심리학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호기심에 그 자그마한 책을 집어 들고 훑어보기 시작했다.

(일본은 전공서 크기가 상당히 작은 편이다)

알기 힘든 용어투성이었지만, 마치 정신과 의사가 하는 일들에 대한 내용 같았다.


집에 돌아와 인터넷으로 더 알아보다가 '임상심리사'라는 직업을 발견하게 되었다.

임상심리사가 하는 일을 보고 나는 한순간 그 직업에 매료되었다.


그날 바로 일본 아마존에서 심리학 개론을 비롯해 임상심리학, 이상심리학 등 임상심리사가 되기 위한 추천 도서 목록을 보며 있는 대로 책을 주문했다.

그렇게 나의 심리학에 대한 여정은 시작되었다.


지금의 나를 이 자리에 있게 한 것은 호기심에 본 책 덕분이다.

그날 도서관에 가지 않았다면, 혹은 다른 책을 보았다면 나는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우연 사건은 나 자신을 바꿔 놓았다.

평생 공부라는 것을 해보지 않았던 내가 공부라는 것을 하게 만들었고, 정신이 나갈 정도로 힘든 고생도 자초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험들은 나를 '도전하는 삶을 사는 사람'으로 바꿔 놓았다.


심리학자 맥아담스(McAdams)는 정체성이 삶의 이야기로 구성된다고 보았다. 그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사건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삶에 통합하느냐에 따라 정체성이 형성된다고 주장하였다. 즉, 우리의 정체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경험을 통해 계속해서 재구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연적인 사건은 정체성 변화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 한 번의 우연은 연쇄적으로 새로운 선택과 경험의 기회를 만들어내고, 이러한 경험들은 우리의 삶의 이야기에 새로운 장(chapter)을 더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을 새롭게 이해하고 재정의하는 기회를 얻게 되며, 이는 정체성의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우연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이다. 호기심에 임상심리학 책을 보았지만, 집에 돌아와 더 검색을 해보지 않았더라면 큰 변화는 없었을 것이다. 우연 사건이 의미 있는 경험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놓치지 않으려는 적극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우연은 새로운 가능성의 문을 열어주지만, 그 문을 통과하여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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