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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치영 Apr 21. 2024

생각하고 실천하면 이루어진다.

70대 부모님과 산티아고 걷기 25

 2022년 6월 3일

 걷기 21일 차: 사아군 -> 엘 부르고 라네로

 어느덧 걷기 시작한 지도 3주가 지났다. 이제 남은 기간이 더 적다. 이 경험은 언제 또 다시 할 수 있을 지 모르겠지만 분명 지금은 힘들어도 돌아보면 그리울 시간일 것이다.

 확실히 출발 시간이 빨라 지면서 일출을 보는 날도 늘어난다. 아침을 상쾌하게 시작할 수 있어서 기분이 좋다.

빠져나가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이정표가 있지만 길을 잘 확인하고 걸어야한다. 오늘 갈 마을은 프랑스 길로 가야 나온다.

 도로 옆길은 지겹다. 꾸준히 그냥 걷는 길. 내가 좋아하는 마을로 가기 위한 길.

 어떤 마을 알베르게에 그려진 그림을 보고 이런 생각을 했다. 누군가 인생은 B와 D 사이의 C라고 했다. 태어남과 죽음 사이에 수많은 선택을 해야한다는 뜻이라는데. 어차피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데 무엇을 위해 짊어지고 욕심내고 살아가야 하는가. 너무 아등바등하지 말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내가 돈이나 물질에 집착을 하는 성향은 아니지만 그래도 또 돈을 벌어야 이렇게 여행도 다니니까. 그리고 아직은 어쩔 수 없이 좋은 직업을 가지고 돈을 잘 벌어야 사회적인 성공을 거두었다는 시선들이 있으니 완전히 무시하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왜 외국에만 나오면 여유가 생기는 것일까? 일상이 아니라 일탈이여서 그런가? 까미노가 끝나고 돌아가서 살아가는 내 일상도 까미노라던데... 그 여유는 왜 3개월 밖에 가지 않았지?

 사실 2018년 까미노가 끝나고 한국에 돌아간 이후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이곳에서 얻은 마음의 평화는 거의 100일 만에 종료됐다. 한국에서는 살아가는 마음가짐 자체가 달라진다. 이곳에서 나를 힘들게 하는 건 나뿐이지만 일상에선 그렇지 않으니까. 이곳에선 내가 나만 잘 다스리고 다독이면 앞으로 걸어나갈 힘이 생기지만 일상에선 그 힘조차 꺾는 또다른 힘이 등장하니까.

 사실 여행이란 그런 거 아닐까? 조급한 마음에서 벗어나 여유를 찾는 것. 만약 한국에서도 여행하듯이 살면 지금과 같은 기분일까?

 오늘따라 길을 걷는 순례자들도 띄엄띄엄 보인다. 도로 옆 지루한 길을 걸으며 잡생각이 들었다가 구름처럼 흩어진다.

 잡생각을 물리치며 도착한 엘 부르고 라네로. 내가 좋아하는 마을이자 순례길에서 아름답다고 손꼽히는 애칭 라피로 불리는 공립 알베르게가 있는 곳. 그리고 한국 라면과 햇반을 파는 가게가 있는 곳이다.

 지난 번엔 라면 파는 가게를 찾는데 실패했지만 이번엔 성공하리라 마음먹었다. 사실 부르고스에서도 라면 파는 가게를 알고 있었는데 앞선 한국인 단체 손님들이 싹쓰리 해갔다고 했다. 그때부터 우리가 라면을 사서 끓여먹기엔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오늘은 꼭 점심으로 라면을 먹으리라. 블로그의 가게 외관 사진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드디어 가게를 찾았다. 밖의 파라솔은 접혀있지만 안에는 영업 중이었다.

 라면보단 햇반을 라면 국물에 말아먹으니 좋았다. 옆 골목에 있는 알베르게에 체크인 했다. 마치 시골 여관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1층은 식당이고 2층에 각각 독립된 방이 있었다.

 씻고 마을을 구경하러 나갔다.

<엘 부르고 라네로의 산 페드로 성당>

 예쁘게 핀 장미를 구경하고 벤치에 앉아 납작 복숭아를 먹었다. 워낙 복숭아를 좋아하는 엄마도 정말 좋아하는 납작 복숭아. 딱딱한 것도 말랑한 것도 모두 맛있다.

 구름이 많았지만 오늘 노을은 멋질 것 같아 기대가 됐다.

 저녁은 알베르게 아래 식당에서 먹었다. 왠지 순례자보다 동네 어르신들이 많이 오는 맛집 느낌이었다.

 일몰 시간에 맞춰 동네 끝에 있는 작은 공원으로 갔다. 이번에 공립 알베르게 봉사자는 노을을 함께 보는 이벤트를 하지 않는 모양이다. 생각보다 사람이 적었다. 지난 번 봉사자님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이런 비밀 공간을 알려주시다니!!!

 역시 노을 맛집이다. 소원 성취한 날. 생각하고 실천하면 이루어진다. 기분이 정말 좋았다. 그래서 평소 셀카도 잘 안 찍는데 부모님과 한 장 찍었다. 순례길에서 부모님과 함께 하고싶었던 것 또 하나 완료!!



*숙소 정보: HOSTEL EL PEREGRINO

 도미토리는 없고 시골 여관 느낌이다. 베드버그 설이 있었던 것 같았지만 우리 방은 괜찮았다. 시설은 좀 낡고 그닥 깨끗하게 느껴지진 않았지만 단독방을 쓰길 원한다면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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