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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치영 Apr 23. 2024

새로운 인연을 만나다.

70대 부모님과 산티아고 걷기 26

 2022년 6월 4일

 걷기 22일 차: 엘 부르고 라네로 -> 만실라 데 라스 무라스 -> 레온

 마을 분들이 많이 모이는 식당이라 시끄러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푹 잘 잤다. 일어나니 컨디션이 꽤 좋았다.

 창 밖으로 일출이 보인다.

 이곳에서 레온까지는 매우 먼 거리다. 대부분 이틀에 나눠 걷지만 우리는 만실라까지 걷고 그곳에서 택시를 타고 레온으로 이동할 생각이다. 그곳부터 레온까지 들어가는 길은 큰 도로를 따라 걸어야 해서 걷기에도 좋지 않았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순례길에서 찍은 사진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을 이곳에서 찍었다. 라네로에서 새벽에 출발해서 여명에 찍은 철제 구조물 사진. 그래서 오늘 아침 그 구조물을 만날 생각에 조금 들떠있었다. 그런데 해가 쨍할 때 보니 그저 밭에 물을 주는 알루미늄 구조물이었다. 그때는 새벽빛을 받아 마치 창처럼 보이기도 하고 방향을 가리키는 화살표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역시 실체를 만나니 별게 아니었다. 그때는 어둡고 멀리 떨여 저서 봐서 아름다웠다보다. 참 우스웠다.

<2018년에 직은 사진(좌) / 2022년에 찍은 사진(우)>

 며칠째 계속되는 이차선 도로 옆길 걷기. 이런 길이 많기 때문에 누군가는 메세타가 재미없다고 한다. 나 역시 이런 길이 싫기는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마을은 대부분 메세타 지역에 있다. 온타나스, 까리온, 라네로 그리고 그 끝에 있는 레온. 메세타는 내가 걷고 싶은 만큼 무작정 걸을 수 있고 아무 생각 없이 걷다가도 툭툭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길이다. 그래서 난 메세타가 좋다.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찾아갈 수 있게 해주는 길이기 때문에.

레리에고스 초입에 있는 알베르게 겸 바에서 쉬었다. 생각해 보니 라네로에서 여기까지도 약 13km 정도 마을이 없다. 마을을 빠져나갈 무렵 길에서 종종 마주쳤던 영국인 노부부를 만나 하나 남았던 태극기 배지를 전달했다. 카스트로헤리츠를 지나 언덕길에서 처음 만났는데 웃는 게 선한 분들이었다.

 오늘도 구름이 참 멋졌다. 지루한 길이지만 구름 보는 재미가 있는 메세타길.

 벌써 만실라에 도착했다. 점점 구름이 어두운 색을 띠어서 비가 내릴까 걱정했는데 비가 내리진 않았다. 마을 바에 들어가 샌드위치를 시켜 점심을 먹고 택시를 불러 달라고 부탁했다. 택시가 도착할 무렵 비가 한 두 방울 씩 떨어졌다.

 레온에 도착했다. 역시 차를 타고 오니 빠르군. 레온에서는 호텔을 잡았다. 집을 떠난 시간이 오래되기도 했고 그동안 잠도 편히 자지 못했기 때문이다. 체크인을 하며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이곳 사장님이 한국분이라고 하셨다. 체크인할 때 직원분이 사장님이 한국 성을 보고는 무척 반가워하셨다고 했다.

 나는 그냥 레온 대성당에서 가깝고 가격대비 괜찮은 호텔을 부킹닷컴에서 예약했을 뿐이데... 곧 사장님이 오셔서 부모님과 기분 좋게 대화를 나눴다.

 호텔은 깔끔하고 좋았다. 대신 3인실이 없어서 부모님 방과 내 방 두 개를 예약했는데 부모님 방 뷰가 좋았다.

<부모님 방 뷰>

 씻고 침대에 누워 쉬다가 가볍게 도시를 둘러보러 나갔다. 걸어왔다면 가우디 건축물과 레온 대성당을 지나쳐 숙소로 왔겠지만 택시로 오다 보니 유명한 곳을 보지 못하고 왔다. 다행히 먹구름이 드리웠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다.

 오늘은 엄마 컨디션이 썩 좋지 않아 가우디 건축물까지만 보고 유명한 츄러스 가게에 들어갔다. 츄러스에 핫초코, 아이스크림까지 배부르게 먹었다.

 저녁엔 산타 마리아 대성당에서 미사를 봤다. 이곳도 부르고스 대성당처럼 미사를 보는 공간은 메인 출입구 옆 쪽에 있다.

 이제 순례길도 절반이 지났다. 지금까지 잘 걸어온 것에 대해 감사의 기도를 했다. 내가 부모님과 함께 나누고픈 경험을 지금까지 모두 누린 건 행운이다. 참 고맙고 감사하다. 언제 이렇게까지 많이 걸었지? 그저 하루하루를 걷고 또 걸으며 지냈기에 순간순간의 기억들이 아름답게 모였으리라.

 저녁은 호텔 사장님이 제공해 준 라면으로 대신했다. 컵라면과 떡볶이, 튀김우동을 먹었다. 저녁이라 양이 적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부모님은 이게 더 낫다며 얼른 먹고 쉬고 싶다고 하셨다. 해외에 있는 기간이 길어지니 컨디션이 떨어지시는 것 같다.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어느 것 하나 좋은 것이 없다 보니. 다행히 내일은 레온에서 온전히 하루를 쉬는 날이니까 대성당만 보고 푹 쉬어야겠다.

 방에서 쉬면서 미카엘이 보내준 순례길 영상을 봤다. 나는 포토북을 만드려고 했었는데 동영상이 나으려나?

 나도 오늘은 레몬맥주와 감자칩을 먹고 푹 자야겠다. 내일은 엄마 컨디션을 잘 확인하며 다녀야지. 이제 순례 례길도 막바지에 접어드니 부모님 건강을 잘 체크하자.



*숙소 정보: INN BOUTIQUE LEON

 내가 묵은 것을 기준으로 지은 지 1달이 채 안 됐던 호텔이다. 신식이라 깔끔하고 침구류도 좋았다. 레온 대성당 근처 호텔이 위치는 좋지만 오래된 곳이 많은데 위치도 괜찮고 새로 지어서 좋았다. 완전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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