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이치영 Apr 25. 2024

쉼표가 필요한 날

70대 부모님과 산티아고 걷기 27

 2022년 6월 5일

 걷기 23일 차: 레온

 레온에서 쉬는 날. 오랜만에 혼자 자서 그런지 푹 잤다. 엄마도 어제보단 컨디션이 좋아지셨다.

 간단하지만 깔끔하게 차려진 조식을 먹고 빨래를 하러 갔다. 일요일 아침이라 그런지 동전을 바꿀만한 곳이 없어보였다. 다행히 이른 아침에 여느 바가 있어서 생수를 하나 사고 거스름돈을 받았다.

 빨래를 하며 핸드폰을 이것저것 만지다보니 i movie를 알게됐다. 약간 기계치인 나는 핸드폰도 전화와 사진, 카톡 용도로만 쓰기 때문에 아이폰을 잘 다루진 못한다. 그런데 어제 미카엘이 만든 영상을 보고 어떻게 했냐고 물어보니 핸드폰으로 만들었다고 해서 이것저것 찾아본 것이다. 이런 기능을 이제서야 깨닫다니... 루르드부터 순례길 초반 사진으로 하루하루 영상을 만들다 보니 세탁이 다 됐다.

 레온 대성당을 보러 나갔다. 레온에는 산타마리아 카테드랄 말고도 산 이시도르 성당도 있다고 했다. 오늘은 이 두 곳만 봐도 좋을 것 같다.

<레온의 산타 마리아 카테드랄>

 레온 대성당은 부르고스보다 규모면에서는 작아 보이지만 스테인드글라스가 멋진 곳이다. 해가 움직이는 시간에 따라 성당 안쪽의 빛도 변한다고 하니 기회가 된다면 오전과 오후, 두 번에 나눠서 봐도 좋을 것 같았다.

 예쁜 색감의 집들이 있는 골목을 지나니 산 이시도르 성당이 보였다. 성당으로 들어가니 일요일 오전 미사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레온의 산 이시도르 성당>

 얼떨결에 주일 미사를 보게됐다. 우리 앞에 앉은 청소년은 꽤 지루한 듯 앉아있었다. 부모님의 성화에 마지못해 나왔듯이. 전세계 어딜가나 청소년은 청소년이었다.

 미사를 마치고 점심으로 일식 뷔페을 먹으러 갔다. 우리가 아는 뷔페가 아니고 주문 용지에 수량을 적으면 계속 가져다주는 방식이라 새로웠다. 배부르게 먹고 호텔로 돌아가 쉬었다.

 지금은 관광도 좋지만 푹 쉬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았다. 레온에서 꼭 봐야할 성당을 봤으니 더 구경하려는 욕심을 버리기로 했다.

 저녁은 호텔 사장님과 함께 먹었다. 어제 체크인 때부터 시간나면 차나 한 잔 꼭 같이 하자고 하셨는데 계속 시간이 엇갈리다 딱 쉬고 있을 때 연락이 왔다. 대성당을 정면에서 바라볼 수 있는 루프탑 같은 곳에 갔다.

 사장님께서 우리 취향에 맞는 음식과 와인을 시켜주었다. 사장님은 내게 궁금한 것도 많았다. 어떻게 이곳을 알고 왔는지 한국 순례자들에게 알리려면 어떻게 해야하는 지 등. 한국 순례자는 서로 정보 공유를 많이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금새 알려질 것이라 대답했다. 코로나 때문에 한국에 못 들어간 지도 꽤 됐고 거의 2년 간 한국어를 쓰지 못했다고 하시면서 아빠와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 아빠도 오랜만에 한국어로 대화할 상대를 만나 좋아하셨다.

 음식도 맛있었고 석양을 받은 대성당은 정말 아름다웠다. 10시가 다 되어서야 우린 헤어졌다. 사장님은 번호를 알려주시며 순례길을 걷다 도움이 필요할 때 언제든 지 연락하라고 했다. 순례길에서 이런 인연을 만나는 것도 행운일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레온에서 또 하나의 좋은 추억을 만들고 갈 수 있어서 기분 좋은 하루였다.

 이제 전체 일정의 2/3가 지났고 2주 정도의 일정이 남았다. 잘 마무리하고 돌아갈 수 있도록 지금부터 컨디션 관리를 잘 해야겠다.

 오늘 여유있던 하루가 부모님께도 충전의 시간이 되었을 것 같다. 남은 이 길을 지금처럼만 즐길 수 있기를 바라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새로운 인연을 만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