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대 부모님과 산티아고 걷기 41
2022년 6월 19일
걷기 37일 차: 오 페드로우조우 ->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어젯밤 숙소 근처에서 축제가 열렸다. 늦은 시간까지 시끄러운 음악 소리과 불꽃놀이가 이어져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컨디션이 별로이다. 거기에 비까지 세차게 내린다. 산티아고는 역시 우리를 쉽게 맞이해줄 생각이 없나보다. 비가 조금이라도 그치길 바라면서 날씨 어플을 보지만 야속하게도 하루 종일 비가 내릴 예정이란다. 결국 우비를 꺼내입고 출발했다.
세차게 내리던 비는 조금씩 잦아들었다. 그래도 계속 비가 내렸기에 습기가 차서 좀 불편했지만 우비를 벗을 수는 없었다. 이번 순례 내내 날씨 운이 좋았건만 아쉽다.
비를 피하러 들어간 바도 무척 혼잡했다. 야외 테이블에 앉지를 못하니 내부가 더욱 북적였다.
다시 길을 나설 때는 다행히 비가 그쳤다. 그래, 비만 안와도 다행이지.
습기를 가득 머금은 흙길을 걷는 건 두 배는 힘든 일이다. 물웅덩이를 피하려고 바닥만 보며 길을 걷게 된다.
길을 걷다보니 방송 촬영을 하고 있다.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장애인 차별 금지와 같은 문구를 들고 걷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 자신들의 의견을 알리기위해 용기있게 길에 나선 사람들. 멋있다.
길을 걷다보니 또다시 비가 쏟아진다. 잠시 비를 피해 쉴 곳을 찾아 들어갔다. 비가 오면 걷기만 힘든게 아니라 쉬는 것도 쉽지 않다. 특히나 대부분 야외 테이블이 더 많기 때문에 좁은 실내에서 우비와 배낭을 벗고 쉰다는 것이 어렵다. 그래서 혼자 걸을 땐 비가 오면 차라리 쉬지 않고 쭉 걸어가는 걸 선호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번 비는 정말 말 그대로 장대비였다.
따뜻한 코코아를 마시며 비를 피했지만 계속 앉아있을 수는 없는 법. 다시 길을 나섰다.
저 멀리 산티아고 대성당 첨탑이 보인다는 몬테 도 고조에 도착할 즈음에 비는 가랑비로 바뀌었다.
멀리 산티아고 대성당 첨탑처럼 보이는 것을 카메라 줌인으로 찍어본다. 그리고 순례자상을 보러 가려 했으나 오늘 이곳에서도 페스티벌이 열리나보다. 바리게이트로 그곳으로 가는 통로가 막혀있었다. 지난 번에도 못 보고 지나쳤는데 많이 아쉬웠다.
어느덧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입구에 들어섰다. 구름이 잔뜩 끼었지만 비는 그쳤다. 도시로 들어오니 보도블럭으로 걸을 수 있어 걷기가 편했다. 비가 오면 아무래도 흙길보단 보도블럭이 나으니까. 물론 이곳에서부터 대성당까지는 한참을 걸어가야한다. 그래도 최종 목적지인 도시 입구에 들어섰으니 기념 사진 한 장.
드디어 37일동안 걸어서 산티아고에 도착했다. 부르고스와 레온에서 2박을 한 것을 제외하면 35일을 매일 걸었다. 무사히 도착했다. 감사합니다.
사실 이곳에 도착한 시점엔 너무 지쳐있었다. 잠도 못 자고 장대비가 오다가 가랑비가 오다가 오락가락하는 날씨까지. 물론 나도 곧 도착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부모님은 아마 얼떨떨하셨을 것이다. 여기가 도착이야? 이런 기분?
광장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을 때 순례길 후반부터 계속 마주치던 미국인 친구들을 만났다. 길에서 만나도 반갑지만 이곳에서 만나는 건 기분이 아주 다르다. 함께 졸업하는 느낌이랄까. 부모님도 처음엔 담담했으나 이들과 인사를 하며 오히려 울컥하신 거 같았다. 그동안의 시간이 기억나셨겠지.
반가운 재회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순례자 사무소로 향했다. 우리는 3명이지만 단체로 인증해서 나만 대표로 들어갔다. 단체라서 그런가 예전과 다르게 컴퓨터로 우리의 정보를 입력하고 크리덴샬을 맡기니 오후 3시에 찾으러 오라고 했다. 그래서 구글 지도로 근처 맛집을 검색했다.
평점이 높은 레스토랑이었다. 음식도 서비스도 훌륭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즐기는 만찬같았다.
지난 번엔 빨간통에 넣어줬는데 파란통으로 바뀌었나보다. 여전히 사람들이 많기에 얼른 밖으로 나왔다.
숙소를 찾아가는 길. 어느 공원으로 들어섰는데 수국이 한가득 피어있었다. 마치 비밀의 화원인 것처럼 꽃과 나무가 다양했다.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오랜만에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쉬었다. 비도 오고 날씨가 선선했는데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다. 이제 더이상 내일 일정을 위해 동키를 예약하고 일정을 고민할 필요가 없다. 한국 갈 준비가 잘하면 된다.
저녁 미사는 무슨 특별 미사였나보다. 주교님도 오시고 신부님들도 엄청 많았다. 미사도 길었고. 산티아고 대성당의 향로미사는 못 봤지만 더욱 특별한 미사를 봤다. 부모님은 이런 경험을 하기가 쉽지 않다며 좋아하셨다. 부르고스에서도 그렇고 이곳에서도 그렇고 좋은 경험을 한 것 같다.
나는 그저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했다. 가장 큰 내 버킷 리스트이자 지난 번 이 길을 걸으며 했던 기도. "부모님과 이 길을 걷게 해주세요."를 들어주셔서 감사하다고. 그리고 혹여 다시 한 번 이 길을 걷게 된다면 내 인생을 함께 나눌 사람과 걷고 싶다고.
조금 늦은 그러나 이곳에서는 일상적인 저녁 식사를 하고 호텔로 돌아왔다.
침대에 누우니 실감났다. 내일은 일찍 일어날 필요도 없고 더이상 걸어서 도착할 목적지도 없다. 미션 클리어!! 1단계 루르드 방문 클리어. 2단계 산티아고 순례길 걷기 클리어. 이제 3단계 무사 귀국만 남았다. 파리 에펠탑도 있긴 하지만.
이번에 내가 느낀 나의 산티아고는 "축제의 이면"이었다. 오늘 이곳으로 오면서 주말이고 휴일이긴 했지만 한밤의 축제가 끝난 적나라한 이면을 보았다. 정리가 안된 공원과 길. 술에 취해 길가에 누워있던 취객. 비단 보이는 것뿐만이 아니라 마음도 그랬다. 화려한 축제의 겉모습보다는 그 축제를 이루기까지의 노력과 화려함 너머의 또다른 모습을 발견한 듯 했다. 무언가 이번에는 그저 산티아고에 도착했다는 기쁨과 환희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면의 어두운(?) 아니, 또다른 모습을 본 기분이랄까. 말로는 글로는 쉽게 설명하고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다. 분명 이 감정들도 내 안에 자양분이 되겠지. 내일은 비가 안오는 산티아고를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
*숙소 정보: NH COLLECTION SANTIAGO DE COMPOSTELA
대성당과는 거리가 있지만 가격 대비 만족스러웠던 호텔. 물론 4년 전엔 이곳이 진짜 좋은 곳인 거 같았는데 이번에 다시 와보니 꽤 낡았다. 시간이 흘렀단 증거이겠지. 조식도 잘 나온다. 혹여나 다시 산티아고에 온다면 또 다시 묵을 것 같은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