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이치영 Mar 21. 2024

최애 순례길을 소개합니다.

70대 부모님과 산티아고 걷기 14

 2022년 5월 23일

 걷기 10일 차: 나헤라 ->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자다

 오늘은 순례길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길이 나온다. 이곳을 부모님과 함께 걸을 생각에 아침부터 마음이 분주했다.

<그루트를 닮은 포도나무와 아빠의 그림자>

 푸른 밀밭과 줄간격 맞춰 심어진 포도밭의 풍경을 담느라 아빠의 걸음이 뒤처졌다. 우리 아빠가 이렇게 사진 찍는 걸 좋아했구나.. 새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조프라는 꽃의 마을이었다.>

 아조프라는 집집마다 꽃을 아주 잘 가꾸어 놓았다. 덕분에 엄마와 아빠가 아주 기뻐하셨다. 작은 마을이지만 꽃 사진 찍느라 한참을 머물렀다. 그리고 오늘 아빠는 하루 종일 카메라 셔터를 누르느라 아주 바빴다.

<아빠의 멋진 사진 작품들>

 아조프라에서 씨루에나까지 가는 길은 푸른 하늘과 굽이진 흙길, 싱그러운 밀밭이 더해져 셔터를 누르지 않고는 버티기 힘든 아름다운 풍경을 뽐냈다.

<만세 포즈를 하고 사진 찍던 외국인을 보자 부모님도 만세를 하고 사진을 찍으셨다.>

 그런데 씨루에나 근처 골프클럽에 다다를 때쯤부터 서서히 파란 하늘이 사라지고 먹구름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길이 곧 나오는데 어쩌지?'란 생각을 하며 언덕 위 골프클럽으로 들어갔다. 원래는 야외에서 먹을 생각이었으나 왠지 비가 내릴 것만 같아 안쪽으로 들어갔다.

 점심으로 빠에야를 시켰는데 맛있었다. 대부분 바에서 주는 건 냉동 빠에야라 맛이 별로라는 평이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배가 고파서일까? 맛있게 먹었다. 골프장에서 운영해서 그런 지 내부 시설과 화장실도 깔끔했다. 점심을 든든하게 먹고 길을 나섰다. 다행히 비가 내리진 않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길이 나왔다. 구름이 잔뜩 껴서 아쉬웠다. 지난번에는 밀밭과 만개한 유채꽃, 파란 하늘이 있어서 다채로왔는데 이번에는 유채꽃은 다 지고 없고 하얀 구름도 아닌 회색의 어두운 구름만 있었다. 정말 속상했다. 부모님은 이 길을 다시 오긴 어려우실 텐데... 그래서 내가 경험한 좋은 것들을 다 느끼게 해드리고 싶었다. 물론 이건 내 욕심이라는 것도 안다. 그래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다.

 순례자 조형물이 있는 곳에서 잠시 쉬었다. 길게 뻗은 내리막길 저 멀리에 오늘의 도착지가 보인다.

<길게 뻗은 내리막길 같지만 은근 높다.>

 마을 입구에 다다르자 야속하게도 맑게 갠 하늘이 보인다. '이건 또 뭐야? 내 인내심을 테스트하는 날인가?' 엄마에겐 나름 기울기가 꽤 높고 미끄러운 흙길인 내리막길이 힘들었으리라. 오늘도 무사히 21km를 7시간 만에 걸었다. 점점 다리에 근육이 붙고 있는 것 같다. 마을 입구 벤치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며 숙소까지 가는 길을 검색했다.

 산토 도밍고 성인에 관한 전설이 내려오는 이 동네는 많은 순례자가 머문다. 작은 마을이지만 대성당에 박물관이 있고 알베르게도 꽤 많다. 지난번에는 그라뇽에서 묵기 위해 그냥 지나쳤지만 이번에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길을 보여드리려면 오늘의 목적지까지 걸어야 했기에 여기에서 하루 머물기로 했다.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 카테드랄>
<각 성당의 세요를 볼 수 있게 해놓았다.>
<성당 안에 닭장이 있다. 산토 도밍고 성인과 닭과 관련된 전설이 있다.>

 성당 구경을 마치고 부모님은 묵주 기도를 하러 작은 예배당 같은 곳으로 가셨고 나는 근처 빨래방으로 빨래를 하러 갔다. 그곳에서 이후 부르고스까지 일정을 정리하고 숙소를 예약했다.

<작은 예배당과 귀여운 초콜릿을 팔던 상점>

 오늘은 정말 알차게 보낸 하루다. 멋진 풍경에 사진도 많이 찍고 아빠도 무척 만족하셨다. 아빠는 자신의 사진 실력을 무척 자랑스러워하시는데 그에 걸맞은 많은 작품이 나온 날이기도 하다. 덜 덥고 바람도 불고 구름이 해를 가려줘서 큰 어려움이 없이 무사히 목적한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만 내가 가장 애정하는 길의 멋진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해 아쉽긴 했다. 이곳에서 모든 것이 완벽하길 바라는 것도 내 욕심이리라. 알면서도 놓지 못하는 욕심. '생각보다 나 욕심쟁이였구나.'란 생각이 절로 든다. 이제 이 길 위에서 각자 경험하고 생각하는 포인트들이 다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니 내 생각만 하지 말고 부모님께도 길 위에서의 자유를 드리자. 멋진 풍경을 더 멋지게 사진 찍으며 걷는 아빠, 꽃과 작은 생물 구경하는 걸 좋아하는 엄마. 그리고 늘 먹을 것과 잠잘 것을 생각하는 나. 우리는 모두 자기만의 방식으로 이 길을 즐기는 법을 알아가는 중이다.

곧 부르고스에 도착한다. 그곳까지 도착하면 순례길의 3분의 1이다. 그곳에서는 이틀을 쉬며 체력도 회복하고 대성당도 구경하려고 한다. 지금까지 크게 아프지 않고 다치지 않고 걷고 있음에 감사하다.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걸을 수 있기를 기도한다.



*숙소 정보: HOSTEL CARPE VIAM

성당 근처에 있는 호스텔이고 각각 독립적인 방으로 분리되어 있어서 좋다. 우리나라로 따지자면 모텔 느낌이랄까? 다만 주인이 상주하지 않아서 애매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대처가 어렵다. 그렇지만 성당에서 가깝기 때문에 위치가 좋다.

매거진의 이전글 순례길에서 우선 순위는 무엇일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