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대 부모님과 산티아고 걷기 21
2022년 5월 30일
걷기 17일 차: 카스트로헤리츠 -> 프로미스타
한국 사람들끼리 있으니 모두 다 일어난 것을 확인한 후 환하게 불을 켜고 짐을 챙겼다.
마을을 빠져나오면 곧 작지만 가파른 언덕을 오르게 된다. 전체적으로 고도가 높은 메세타 지역이기에 언덕이긴 하지만 해발이 900m가 넘는 곳이다.
언덕이 꽤 가팔라서 아빠가 좀 힘들어하셨다. 정상에서 사진을 찍고 잠시 쉬었다. 그리고 언덕의 내리막길 직전 오늘의 포토스팟을 발견했다.
너른 들판의 초록색, 황금색, 빨간색이 눈을 사로잡았다. 그 사이에 작은 길이 멋지게 나있고, 그 길 위에 있는 순례자들의 행렬이 마치 개미군단 같았다.
빨간색의 정체는 양귀비꽃이었다. 그동안은 밀밭 속에 한 두 개씩 피어있는 걸 본 것이 다였는데 양비귀꽃밭이라니. 새빨간 색이 정말 화려했다.
그리고 초록의 밀밭은 어느덧 황금색을 자랑하고 있었다. 마치 가을의 황금 녘 들판을 보는 듯했다. 제대로 눈요기를 하며 첫 마을을 만났는데 바에 사람이 너무 많았다. 마을을 자주 만나는 날이 아니고 어제가 일요일이어서 배낭에 간식거리도 많지 않았다. 그렇지만 컨디션이 나쁘지 않아 그냥 조금 더 걸어가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보아딜라 델 까미노까지 도착했다. 점심시간이고 쉬지 않고 왔기 때문에 예전에 머물렀던 알베르게로 갔다. 코로나여서 그런지 알베르게는 문을 닫았고 옆에 호텔만 영업을 하고 있었다. 호텔 로비에 들어가 가볍게 빵과 커피를 주문했다. 내가 종업원에게 뭔가 먹을 것이 있냐라고 물어봤을 땐 작은 빵 밖에 없다고 하더니 알고 보니 뒤쪽 식당 같은 곳에서 보카디요랑 샐러드도 파는 것이 아닌가. 기분이 상했다. 분명 먹을 것이 있냐고 물었는데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지금 로비의 바엔 커피와 작은 빵 밖엔 없지만 우리 호텔 식당에선 가벼운 식사를 할 수 있다고 안내해 주는 것이 정상적이지 않나? 나만 그렇게 생각하나? 예전에 왔을 때도 여기 응대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또 그렇다니. 정말 다음에 또 온다면 여기에선 쉬지도 말아야겠다. 이 마을은 나랑 안 맞는 듯.
혼자 마음이 상해서 택시를 불러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결국 프로미스타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그리고 프로미스타로 가는 운하 옆길은 내가 좋아하는 풍경이기도 하고.
가는 길에 데비를 만나 엄마 모자에 있던 태극기 배지를 선물로 줬다. 이제는 길에서 만나면 누구보다 반갑게 인사하는 엄마와 데비다.
확실히 20km를 넘게 걸으니 엄마가 많이 힘들어하셨다. 운하 옆길엔 옆에 앉아서 쉴 곳도 마땅치 않아 그냥 천천히 걸어 프로미스타에 도착했다. 미쉐린 책자 기준으로는 오늘 걸은 거리가 23km고 생장에서 나눠 준 고도표에 따르면 25km다. 뭐가 더 정확한 지는 모르겠지만 8시간 만에 도착.
프로미스타로 꽤 큰 마을인 것 같다. 성당만 3개가 있다고 했다. 호텔에 가는 길에 슈퍼에 들러 가볍게 마실 물과 간식거리를 샀다. 어제 알베르게에 묵어서 오늘은 편히 쉬고자 호텔을 잡았다.
프로미스타에 있는 성당을 둘러보러 마을을 걷자니 사람들이 별로 안 보였다. 아까 아침에 바에 있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지? 생각보다 큰 마을인 것 같았지만 또 작은 마을인 것 같다. 마을에 사람도 많지 않고 한적했다. 구글로 찾아본 맛집이 월요일 휴무라 아쉬웠다.
호텔 식당은 나쁘지 않았지만 맛있지도 않았다. 가격은 비쌌는데 음식이 늦게 나와 조금 실망스러웠다.
오늘은 지나는 마을이 많지 않았는데 바에 사람들이 많아서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많이 걸었다. 아마 그래서 엄마는 더욱 힘드셨을 것이다. 매일 걷는 것이 일상이다 보니 요일 감각이 없어진다. 마을을 적게 만나면 슈퍼에서 간식거리라도 많이 사서 다녀야 하는데. 앞으로는 좀 더 세심하게 챙겨야겠다.
*숙소 정보: HOTEL RURAL OASIBETH
명색이 호텔인데 욕조가 없어서 아쉬웠다. 주인아저씨는 친절하셨고 음악 선곡이 좋았다. 로비에 영화음악을 틀어주셨는데 나랑 취향이 비슷하신 듯. 방은 깨끗했다. 다만 식사는 밖에서 하는 게 더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