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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치영 Apr 15. 2024

가야만 하는 길

70대 부모님과 산티아고 걷기 22

 2022년 5월 31일

 걷기 18일 차: 프로미스타 -> 까리온 데 로스 콘데스

 꽤 이른 시간에 출발했다. 대부분 7시가 넘어서야 출발하는데 오늘은 준비가 빨랐다. 순례길에 점점 적응한다는 증거일 것이다. 길을 걸으니 등 뒤에서 해가 뜨기 시작했다.

 사실 프로미스타부터 까리온까지는 도로 옆을 따라가는 지루한 길이다. 하지만 만나는 마을이 많아서 걷다가 지칠 때 쉬기 좋기도 하다.

 오늘따라 도로 옆 자갈길에 달팽이가 많이 보인다. 그동안에도 길을 걸으며 보긴 했는데 오늘처럼 진짜 다닥다닥 붙어있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천천히 길을 가로질러 가려는 달팽이가 귀여웠지만 순례자들 발에 밟혀 죽은 달팽이에는 개미들이 달려들어 있어 불쌍하기도 했다. 어쩌면 이것이 자연의 섭리. 달팽이의 운명일 수도 있다. 이렇게 길을 건너가는 것이 거북이가 해안가에서 알을 낳고 돌아가는 것처럼 아이를 낳으러 가는 것일까? 아니면 너무 뜨거워서 수로로 가려고 하는 것일까? 사람들에게 밟힐 위험이 높다는 것을 알면서도 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을 텐데... 만약 그것이 무섭다면 안전한 곳에만 머물러야 하겠지.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위험을 피하려면 집에만 있어야 한다. 집 밖으로 나간다는 건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한다는 것이다. 여행도 마찬가지고. 달팽이를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도로에는 차량 통행이 거의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생각보다 지루한 길인데 구름이 예뻐서 사진을 많이 찍었다. 길이 쭉 뻗어있어서 순례자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걷기에 다양한 사람들과 스몰토크를 했다. 독일에서 온 77세 할머니께서는 제일 친한 친구가 한국에서 온 간호사라고 하셨다. 같이 온 친구가 다리가 아파서 친구는 택시를 타고 이동하고 할머니는 천천히 혼자 걷고 있다고 하셨다. 세계 공통 화제인 손주 자랑을 내게 하시면서 잠시 함께 걸었다. 그 연세에 친구와 떨어져 혼자 걷는 것이 쉽지 않을 텐데 각자의 순례를 지키면서 동행을 하신다는 게 대단해 보였다.

 그리고 LA에서 온 할머니, 할아버지와도 만났는데 할머니가 더위에 약하셔서 오늘 컨디션이 좋지 않으시다고 했다. 그런 할머니의 발걸음에 맞춰 할아버지가 천천히 걷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하긴 우리 부모님도 엄마 컨디션에 맞춰 아빠가 걷고 계시니 부부란 역시 그런 것일까?

<산타 마리아 라 블랑카 성당>

 그렇게 다양한 순례자와 얘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덧 목적지 전 마을인 비얄카사르 데 시르가에 도착했다. 이곳엔 템플기사단이 사용한 성당이 있어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오늘따라 엄마가 계속 발이 아파했는데 신발이 잘 맞지 않는 것 같았다. 특히 오늘 길은 자갈이 많은 길이라 엄마가 계속 힘들어했다. 그래서 내 운동화와 바꿔 신었더니 좀 괜찮다고 하셨다. 나 역시 엄마 신발이 잘 맞아서 다행이었다.

 멋진 구름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덧 까리온에 도착했다. 순례길에서 애정하는 마을 중 하나인 곳. 미사를 꼭 드려야 하는 마을. 너무 더워지기 전에 도착을 해서 다행이었다.

 까리온에서는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알베르게가 워낙 유명하지만 예약도 받지 않는 걸로 알고 있었다. 괜히 걸으면서 시간에 쫓기면 불안하니까 성당 근처 호스텔을 예약했다. 먼저 체크인을 하고 점심을 먹으러 나왔다. 한국어로 식사가 된다고 적혀있는 곳들도 있었다. 이제 곧 순례길에서 한국어 메뉴판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시원하게 맥주로 곁들어 배부르게 점심을 먹었다.

<산티아고 성당>
<산타 클라라 수녀원>

 아쉽게도 산타 마리아 성당에서는 지금 전시를 하고 있었다. 여기 성모 마리아상을 제일 좋아했는데 부모님께 보여드리지 못해서 아쉬웠다. 대신 전시를 봤는데 성모 마리아가 주제인 것 같았다. 나오는 길에 기념으로 도록을 구매했다.

 마을을 둘러보니 까리온은 나름 큰 마을인 것 같았다. 아래에 강이 흐르고 공원도 꽤 잘 조성돼 있었다. 살기 좋은 마을인 듯. 지난번에도 마음에 들었는데 까리온 참 좋은 동네다.  

 

 오늘 저녁 미사는 산 후안 성당에서 진행됐다. 까리온은 미사가 끝나고 순례자들을 모아 수녀님들이 직접 만든 별을 선물해준신다. 오늘은 미사가 끝나고 수녀님들이 노래를 불러주시면서 별을 나눠주셨다.

 로스 아르코스에서부터 만난 호주에서 온 한국 아주머니는 이곳에서 며칠 머무신다고 했다. 뭔가 조용히 정리하고픈 게 있으신 느낌이 들었다. 순례자들은 모두 각자의 사연을 갖고 있으니까. 종종 알베르게에서 만나면 반가웠는데 아마 더 이상 길에서 만나지는 못할 것 같다. 순례길을 잘 마무리하시라고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산티아고에 와서 부모님과 함께 하고싶은 것 중에 두 번째 것을 완료한 날. 온타나스에서 노을 보기, 까리온에서 미사보기. 오늘은 길도 어렵지 않았고 다양한 순례자도 만나고 좋은 하루였다.

 까리온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마을이다. 지난번에도 그랬고 이번에도 참 좋았다. 수녀님께 받은 내 인생의 두 번째 별을 잘 품고 앞으로 남은 길을 걸어야겠다. 정말 마음에 드는 마을. 다음에 또 온다면 나도 며칠 머무르고 싶다.



*숙소 정보: HOSTEL SANTIAGO

 골목 안쪽에 있어서 지도를 잘 보면서 찾아야 했다. 조금 오래된 것 같으나 내부는 깔끔했다. 1층에 커피 자판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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