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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보배 Apr 21. 2018

내 삶, 긴 여행의 시작

우리의 동행은 당신의 결심에서 시작되었다

“또 딸이면 어떻게 해!”

“괜찮아. 딸이어도 큰 사람 될 아이야!  태몽이 보통이 아니었어!! 내가 책임질게.”


딸이 다섯명쯤 줄줄 달린, 당장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 집안의 맥을 끊게 만든 종갓집 맏며느리와 남편의 대사도 아니었다. 딸아들 골고루 섞어 7형제 중 6째이자 막내아들인 우리아빠와, 고작 내 위에 형제라고는 2살 많은 언니하나 먼저 낳아둔 우리 엄마의 대화.


다만, 내가 태어나기 전 나의 20명쯤 되는 사촌들 사이에 아들이라고는 고작 3명뿐이었고, 기가 세도 보통 센게 아닌 “철저한 남아 선호 사상자” 욕쟁이 시어머니 역할의 우리 할머니가 “저 며늘년들은 허구헌날 보~지만 낳는다”는 구박을 시도때도없이, 들을 주체도 명확하지 않게 해 둔 탓에, 이미 딸하나를 낳은 죄를 지은 막내 며느리로서는 초장부터 기가 질릴만도 했겠다.

게다가. 집이라도 잘살았다면 공주든 왕자든 더 낳아 이쁘게 키우면 될 일이다만, 당장 내 집 한칸이 없어 단칸방 월세사는 박봉의 젊은 군인 부부에게 찾아온 둘째 소식은여러모로 부담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심지어. 당시에는 임신중절 수술이 불법이 아닌시기라, “엄마,아빠”의 선택에 따라 나는 이세상의 빛을 볼수도, 보지 못할수도 있는! 절체 절명의 기로에 서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내 목숨을 구한건 아빠가 내 태몽이라고 생각하는 그 꿈속에 나타난 뿔이 어마어마하게 큰 사슴이었을까. 보통아이가 아닐꺼라고 엄마를 안심시키고, 응원하고, 다짐해 준 우리 아빠덕에 나는 무사히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한다.



“니아빠 아니었음 넌 세상에 나오지도 못했어”

엄마는 종종 나에게 이런 농담을 했었는데, 분명 들었을땐 나도 별 서러움 없었고, 그저 농담으로 들었던게 분명한데. 지금에서 생각해보면 어린 나는 굉장히 마음아프게 들었었던가보다. “엄마가좋아? 아빠가 좋아?”라는 잔인한 질문에(사실은 전혀 궁금하지 않으면서 장난으로 쉽게 하는 이런 질문은 하지 말아야한다. 굳이 아이들을 고민과 혼란속에 빠뜨릴 필요는 없지 않은가. 아이들이 엄마와 아빠의 선호도를 굳이 정의내리게 할 필요가 없다.) 보통의 아이들이 쭈볏대는것과 달리 나는 “아빠요...”라고 대답하는 때가 많은 아빠바라기였다. 그렇다고 엄마와 사이가 안좋았다 좋았다 그런것을 생각 할 필요도 없이 충분한 엄마아빠의 사랑을 받으면서 컸다. 다만 아빠에 대한 사랑이 조금 더 유난했을뿐이다. 엄마도 아빠도 다 좋았지만, 난 아빠가 정말 좋은 그런 아이었다. 내가 써놓은 “니아빠 아니었음 세상에 나오지도 못했다”라는 말을 다른 사람들이 읽고, “어머, 어려서부터 엄마한테 미움받았나봐, 상처받았나봐”라고 오해할것이 걱정되어 부연 설명을 쓰고 있을 정도로, 저런 말이 농담이 될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한 사랑을 받고 자랐다.


다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엄마의 저 말이 "정말 농담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점점 마음 깊이 이해하게 되고, 심지어 머리로도 이해하게 되었달까. 엄마의 결심이 없었더라면, 단지 아빠 꿈에 나온 숫사슴 한마리가, 혹은 아빠 혼자의 오롯한 결심이 날 세상까지 안전하게 배달했을 리는 없으니까. 월급이 박봉인 직업군인, 그것도 하사관인 아빠의 “내가 책임질게”라는 각오와, 기꺼이 이 가난함 속에서도 내가 너를 품고, 낳고, 키우겠다는 엄마의 결심이, 우리를 이 삶의 여행 동반자로 만들어 주었다는걸 안다. 그래봐야 지금의 나보다 훨씬 어린 20대 후반의 어린 부부는, 책임감과 각오로 자신들의 삶이 비록 지금은 퍽퍽하더라도 지켜야 할 하나의 생명을 결심해 준 것이다.  


엄마와 해외여행을 시작한 것은 내가 취직을 해서 돈을 벌기 시작하고 부터이다. 사주에 쌍역마가 들어앉았나, 틈만 나면 비행기를 타고 어딜 끼어 나가려는 둘째딸은 제스스로 따박따박 들어오는 월급이라는 돈을 벌기 시작한 후부터 직장에 매여있는 아빠와 달리 시간적인 여유가 있는 엄마와 먼저 해외여행을 시작했다. 가능한한 딸이 모든 여행경비를 부담하는 그런 여행이었다.


가난했던 시간들, 돈을 모으느라 고작 몇백원까지도 가계부에 적어던 엄마, 아이들 학원비 대신 모든 공부는 직접 가르치려고 애썼던 아빠, 월에 한번 가족 외식도 큰 맘 먹어야 가능했던 시간들. 그냥 우리나라의 대부분이 지내온 80~90년대 이야기일텐데 나의 마음에는 나도 모르게 엄마 아빠에게 이유를 알수 없는 부채감이 있었던것 같다. 어느 순간 부터는 혼자 좋은 곳엘 가면 엄마 아빠 생각이 났고, 엄마아빠는 와보지도 못한 좋은 곳에 혼자 왔다는 죄책감이 느껴졌다. 혹시 엄마 아빠가 먼저 다녀갔던 곳에 찾아가서야 (그럴 일이 거의 없기는 했지만) 마음 편히 여행을 즐기는 내가 있었다. 그러다보니그럴바에야 그냥 다 같이 가는게 나을 것 같았다. 엄마와 아빠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고, 그동안 누리지 못한 것들을 최대한 누리게 해주고 싶었다. 나와 내 형제를 묶어 "우리"라는 자식의 범주를 만들어, 우리 때문에 누리지 못한것들과 포기해야했던 것들을 최대한 많이 보상해주고 싶었다.

엄마와 단둘이 떠났던 캄보디아. 사진을 찍는 낯선 엄마를 만난곳.

엄마는 여행을 기꺼이 즐겼다. 나와 가는곳이 어디인지 정확한 지명이름을 대지 못해도, 지나가는 사람, 스쳐가는 풍경 한장면에도 놀라울만큼의 관찰력을 발휘했으며, 이렇게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었던가 싶게 궁금한것도 많았다. 내가 모르는 엄마를 만나는 시간은 늘 놀라웠고, 엄마가 기뻐하는만큼 나도 기뻤다. 돈을 벌어서 엄마를 이렇게 기쁘고 신나게 만들 수 있다면, 기꺼이 회사의 사노비가 되어도 좋겠다 생각할만큼 뿌듯했다.


엄마랑 둘이 떠나기 시작하면서, 둘이 보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아빠를 더 좋아하던 아이”는 “엄마도 아빠만큼 좋아했었던 아이”였다는것을 더 많이 깨닫고 있다. 물론 엄마와 둘이 오붓하게 쌓아가는 시간들이 행복하고 좋기는 하지만, 아빠가 혼자 집에 있어야 하는 상황, 혼자 출근도 하지만 끼니도 챙겨야 하는 상황이 너무 싫었다. 사실은 여행을 좋아하는 아빠는 “돈안쓰고 모으는게 습관이 되어서 그래”라는 엄마의 말처럼 맨날 부대 핑계로 엄마랑 둘이서만 다녀오라고 했다. 하지만 아빠가 정년퇴직한 후부터는 부대 핑계 같은것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아빠가 안가면 엄마랑도 안가!”라는 반 협박을 한 끝에야 엄마 아빠 딸 이렇게 세명의 해외여행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어쩌다보니 최소한 1년에 한번쯤 치러야하는 연례행사가 되었다. 세명이 함께하는 여행은 같은 사건을 두고 어떻게 서로 다르게 기억이 하는가를 나눌수 있게 하여 “과거사 진상규명”의 장이 되기도 한다.  


최대한 알뜰하게 여행을 하려고 하지만, 분명 적지 않은 돈이 든다. 내가 버는 돈으로 세명의 여행비를 대다보면 내가 모으는 돈은 줄어들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나를 세상에 데리고 와 준 나의 엄마아빠와이 여행을 위해서라면, 아깝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정말 "내가 살 내 집"도 없던 시절, 나를 데리고 이 생의 긴 여행을 하겠다고 다짐했던 젊은 엄마아빠를 생각하면 "아깝다"라는 생각을 할 수조차 없다. 내가 번 돈을 전부 다 써버리는것도 아닐 뿐더러, 내가 지금 그 돈을 안쓰고 모아서 언젠가 엄마아빠와 여행을 할 수 있을만큼 돈을 모은다 한들, 엄마아빠와 여행을 함께 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지금이 우리가 여행해야하는 그 시간인 것이다. 돈은, 나중에 더 많이 벌고 더 많이 모아도 늦지 않으니까.

우리의 여행은, 엄마아빠가 나와 함께 이 세상을 함께 살아보겠다고 다짐하는 순간, 이미 시작된 것이다.


엄마랑 아빠는 점점 닮아간다. 그래서 더 좋다.



흙수저라는 말이 생길것이란건 상상조차 할수 없도록 모두가 치열하고 가난하던 시간을 맨손으로 일궈낸 가정에서 세명이나 되는 자식들을 데리고 잘 지나온 엄마아빠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젊은 나이에 쓰는 "옛날얘기"가 되겠지만, 그래도 삶이 팍팍해 ‘이런 우리삶에 좋은 날이 오기나 하겠냐’고 상심한 누군가에게 ‘힘든 시간을 견디면 행복한 시간도 찾아올것’이라는 실낱같은 희망일지라도, 힘이되는 이야기를 전해주고 싶다. 아이 낳기 힘든 세상이라고 하지만, 낳아 기르고 보면 이렇게 좋고 행복한 시간이 찾아오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누구를 위한 글이 아니더라도, 무엇보다 그냥 나는 나의 엄마와 아빠를 더 많이 더 오래 기억하고 싶다. 가능한 많은 시간을 기록하고 싶다. 내가 너무 늦게 우리 엄마와 아빠에게 관심갖기 시작한게 아니길 바란다. 내가 내친구와 내 연인을 챙기느라, 혹은 내 인생만 챙기느라 그저 내 옆에 있는것을 당연하게만 여기고 특별히 할애하지 않았을 우리 엄마아빠와 함께하는 소중한 시간을 많이 남기고 싶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당신도 엄마와 아빠와 가능한 많은 시간을 함께 나누라고, 사실 우리는 남은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얘기 하고 싶다. 반려견/반려묘의 이야기, 자기의 자식 이야기, 직장이야기, 친구이야기, 맛집을 다닌 이야기, 연애 이야기, 여행 이야기,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는 많이 쓰고 그리는 세상이지만, 자신의 엄마아빠 형제의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은 퍽 많지 않아 보여서. 어쩌면 다들 부모님을 잊고 있는건 아닌지,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건 아닌지 싶어서 말이다.


이렇게 사부작 사부작 써내려가는 그 시간에 나의 잘못된 기억들과, 어쩌다보니 상처났던 마음들도 보듬어 줄 생각이다.  또 내가 엄마 아빠에게 본의 아니게, 혹은 아주 의도적으로 상처주었던 기억들을 반성할수 있을 테니 우리가 떠난 여행은 과거의 추억과 만나며 좀 더 멋진 시간으로 정리될 것이다. 그렇게 우리만의 소중한 기억을 남기는것 만으로 엄마아빠에게 큰 감동을 줄 수 있다면, 이 글은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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