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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보배 Jul 02. 2018

거문도, 백도에서 아빠는 할머니가 보고 싶다고 했다.

할머니를 추억하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오랜 시간 전, 우리 가족은 강원도 양양에 있는 이름도 재미난 '물치'라는 동네에 살고 있었고, 할머니 집은 충청도 청원군의 작은 마을 부강면에서도 더 들어가야 하는 '문곡리'라는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 그시절(80년대 말?) 우리 집은 차가 없었고, 일 년에 한두 번 명절을 맞아 할머니 집으로 갈 때마다 우리 집 다섯 식구는 어디 이민 가듯 비장하게 짐을 챙겨 버스를 타고 가야 했다. 세상 제일 효자 아들 우리 아빠는 우리도 없는 살림인데 그래도 시골 사는 일가친척들에게 갖다 준다며 아주 큰 박스를 탄탄하게 접어 터지지 않게 만든 다음 설탕이며 병맥주 같은 것들을 하나 가득 넣고(커서 알게 됐는데 그 당시엔 설탕이 비쌌다고 했다) 노끈으로 질끈 묶어 한쪽 어깨에 짊어졌고, 또 다른 손으론 가족들의 갈아입을 옷 등이 들어있는 큰 옆가방을 하나 맸다. 엄마는 1번인 언니 손에 2번인 나를 꼭 쥐게 하고, 3번인 아들을 포대기에 둘러업은 다음, 애들 먹을 간식들이 들어있는 작은 가방을 또 하나 겹쳐 맸다. 자기가 살 집보다 차부터 먼저 사는 우리 세대에는(뭐 집값이 적당히 모아서 살 수 없을 만큼 비싼 이유도 있지만) 상상조차 잘 가지 않을 내 추억 속 명절 모습.


아궁이가 있는 옛날 집, 아랫목은 아궁이에서 올라온 열기로 장판이 거무스레 눌어붙었고, 벽에 나무문이 달린 벽장이 있고(지금 생각하면 built-in이네), 누우면 천장에 대들보가 보이고, 창호지 문이 있고, 푸세식 화장실이 무섭던 할머니 집에 들어서면 집안 곳곳은 할머니의 성격을 고대로 보여주듯 반들반들 윤이 돌았다. 키는 150도 채 안되셨지만 허리는 꼿꼿하시던 우리 할머니는 70이 넘은 나이에도 늘 닭이 울기도 전 새벽같이 일어나 길고 긴 흰머리를 곱게 빗고 틀어 올려 은비녀 하나를 꽂으시며 하루를 시작하셨다. 마당을 쓸고 부엌에 가서 아궁이 불을 살피고, 가마솥에 물을 더 넣어 끓이고... 먼길을 달려온 막내며느리가 깰까봐 마음이 쓰이셨지만 그래도 새벽일찍부터 집 구석구석을 쓸고 닦아야 하루가 제대로 시작한다고 생각하시는 본인 성격상 최대한 조용조용하시곤 했다지만, 그렇다고 막내며느리가 정말 맘 편히 누워있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유관순 언니가 만세를 부를던 시대에 이미 여덟아홉살쯤이셨다는 역사의 증인같았던 우리 할머니는 글을 읽지 못하시고, 셈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으셨지만 성냥개비를 놓고 셈을 할 줄 아셨고, 말싸움을 해도 논리에서 전혀 밀리지 않으셨고, 시간이 많이 지난 일도 정확히 기억하시는 총기가 넘치는 분이셨다. 


"노~옥긔여~~~~~!!!"

아빠가 어린 시절, 그러니까 할머니가 젊은 시절. 마을 초입에서 할머니가 아빠 이름을 부르면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마을 길을 따라 200미터는 떨어져 있는 마을 끝까지 울렸다고 했다. 식당에서 욕을 하며 장사하시던 "욕쟁이 할머니"처럼 늘상 입에 욕을 달고 사시지는 않았지만, 한번 터졌다 하면 충청도 할매 맞나 싶은 속도로 욕사포를 쏟아부으셨는데, 그 욕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상상해보면 대체 이런 창의력은 어디서 나오는가 감탄과 웃음이 동시에 터질 만큼 신통방통한 욕을 쏟아내시던 우리 할머니는 정말 보기 드문 여장부셨다. 내가 대학에 가고 나서 할머니의 욕을 따라하거나, 욕을 풀이하면 할머니 본인도 웃으시고 감히 할머니에게 그렇게 할 생각을 하지 못했던 다른 가족들도 웃음보가 터지곤 했었다. 


할머니가 80세도 넘으셨던 어느 날인가는, 집 앞 고등학교에 찾아가 교감선생님을 혼낸 적도 있다. 사연인즉슨 할머니 집 앞에는 공업고등학교(지금은 뭔가 창의와 혁신 같은 미래지향적 단어가 들어간 이름으로 바꾸었으나)가 있었는데, 한창 반항기의 불타는 청춘들이 학교 선생님들의 감시의 눈을 피해 할머니 집 담벼락 앞에 숨어 담배를 피우곤 했던 모양이다. 일단 어린아이들이 담배를 피우고 말고 보다 할머니를 더 화나게 한 것은, 이누무자식들이 (겁도없이) 담배꽁초를 막 버려서 할머니 집의 담벼락을 지저분하게 만든 것. 본디 한시도 쉬지 않고 쓸고 닦아시는 분이 집 앞에 나갔는데 담배꽁초에 더불어 찍찍 뱉은 침이라니.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화가 잔뜩 나신 우리 할머니 급기야 길 건너 학교 교무실로 찾아가셨단다.


"아 할머니 어쩐 일이세요" 어느 선생님이 말을 건네기가 무섭게

"여기 교장이 누구래유? 교장 한번 손들어봐유"라고 외치셨단다. 키는 150도 안되시고 머리는 새하얀 할머니니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시고 위풍당당 교무실에 들어오셔서 "교장 손들어!"를 외치자, 교무실은 순간 정적이 흘렀겠지. 당황하신 선생님들의 당황함속에서 아마 교감선생님이 나오신 모양이다. 보통 교장실은 따로 있으니까. 

"예, 할머니 제가 이학교 교감입니다. 무슨 일이세요? 저한테 말씀하세요"

"교감선생님이에유? 그럼 한번 잘 들어봐유. 여기 학교 핵생들이 맨날 와서 남의 집 댐벼락밑에서 죄~ 담배를 펴싸고 그걸 그~~ 냥 바닥에 버리고 그리고 가면 어떡한대유? 학교에서 그렇게 가르쳤슈? 어디 한번 얘기해봐유! 그러면 되겠어유~안되겠어유?!"

그 날 그 공고 아이들은 우리 할머니 집 앞 담벼락은 물론 동네 청소를 하러 나왔고, 그 이후로 할머니 집 담벼락엔 담배꽁초는 없었다고 했다.


일가친척 모두 우리 할머니는 분명 100살쯤은 문제없으실 거라고 장담했는데, 사랑하는 우리 할머니는 90살은 넘기셨지만 100이라는 숫자는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8년 전 7월 이맘때.

봄이 찾아오던 시간, 아빠엄마와 함께한 거문도



아빠가 선택한 거문도, 백도 여행
아빠는 할머니가 그리워 이곳을 고르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4년쯤 지났을 때쯤, 2013년 봄바람이 살랑거릴 때, 엄마 아빠와 함께 거문도라는 섬에 여행을 갔다. 엄마와는 해외여행을 다니기 시작했지만, 아직 은퇴전이셨던 아빠와 해외에 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에 국내 여행이라도 열심히 다니자고 우기고 우겨서 틈날 때마다 국내여행을 하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늘 장소도 내가 먼저 골라서 정한 다음 나의 억지와 애교와 전혀 논리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막무가내 협박으로 아빠의 시간을 만들어내곤 했는데. 어쩐 일인지 이번엔 아빠가 "거문도, 백도"에 가고 싶다고 하셨다. 무려 아빠가 가고 싶다는 곳이 있다면, 열 곳 제처 놓고 그곳부터 갈 일이었다. 


모든 풍경을 사진으로 담고 싶어하시던 아빠


전라남도 저편에 있는 섬 거문도. 여수에서 배를 타고 2시간 20분쯤을 달려가면 나오는 곳. 학문이 높은 사람들이 많아서 '거문(巨文)'이라고 했다는 아름다운 섬. (중학교 땐가 영국군이 거문도를 점령했다는 내용을 배우면서 나는 왜 거문도를 강화도 근처 즈음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리고 이 여행을 갈 때까지 그 믿음을 간직하고 있었던걸 보면 그냥 생각 없이 외웠던가 싶다.)  


그리고 거문도에서 배를 타고 40분쯤 가면 나오는 섬. 파란 바다 가운데 우뚝우뚝 솟아 나온 그림 같은 바위섬들.국가 명승지 제 7호, "백도"가 나온다. 섬 전체가 온통 하얗게 보인다 해서 백도라고 했다고도 하고, 섬이 100개에서 하나 부족해 백(百)에서 한 획(一)을 빼 백도(白島)라고도 했지만, 사실은 39개뿐인 돌섬.

옥황상제의 아들과 용왕의 딸이 눈이 맞아 머물렀는데, 아들이 보고 싶은 옥황상제가 100명의 신하에게 아들을 데려오라고 내려 보냈지만, 섬의 아름다움에 반한 겐지, 용궁 궁녀의 아름다움에 반한 겐지, 신하들 마저도 돌아오지 않아 화가 난 옥황상제가 아들도 신하도 모두 돌로 만들었다는 전설을 간직한 섬.                                    


'옥황상제도 참 심술 맞지. 보고 싶으면 자기도 한번 다녀가면 될 것을, 아들도 100명의 신하들도 모두 돌로 만들어 버리다니. 그러고 나서 자기도 섬처럼 외로웠을걸?' 이런 생각을 하면서 진한 옥빛 바다에 취하고, 눈부신 햇살에 취하고, 아름다운 섬에 같이 홀려 들고 있었다. 

비바람도 견뎌야 하고, 아무도 내릴수 없어 그저 둘러만 보고 가는 외로움도 견뎌야하는 섬. 백도
그래도 꿋꿋하게 나무를 키우고, 물새를 키운다.


백도 비경
백도 비경
백도 비경



한참 사진을 찍고, 감탄을 하던 아빠가 뜬금없이 그러신다. 평생 육지에서만 사신 충청도 사람 우리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그렇게도 "거문도, 백도"를 가보고 싶어 하셨다고.  할머니는 아마도 누군가에게 들으셨겠지. 저기 먼 남쪽나라 바다에는 사진에는 채 담을 수 없을 만큼 눈부신 섬이 있다고. 그 섬에 가면 옥황상제의 아들도, 용왕의 딸도 모두 나와 함께 노니는 것만 같다고. 하지만 할머니는 끝내 돌아가시기 전에 이곳에 한 번도 다녀가지 못하셨더랬다.  


"아빠. 아직도 할머니가 보고 싶어?"

"당연하지. 엄만데. 아직도 많이 보고 싶지..." 덤덤한 듯, 한숨 내뱉듯, 진심이 잔뜩 담겨있는 아빠의 대답에 아무 말할 수가 없었다. '아직도 할머니가 보고 싶어?'라니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이 또 어디 있을까. 나만해도 지금 우리 엄마 아빠가 이렇게 좋은데, 할말이 없는데도 엄마를 계속 엄마엄마 부르기만 해도 너무 좋은데, 아빠라고 "엄마"가 안 보고 싶을까. 남자 어른이어도, 나이가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라 해도, 자식이 셋이나 있어도, 아빠도 할머니한텐 자식이고, 할머니는 아빠의 "엄마"인데. 나는 왜 아빠는 남자고, 아빠고, 어른이니까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시간도 좀 지났으니까 괜찮아졌겠지!라고 생각했을까? 그건 괜찮아지고 아니 고의 문제가 아니고 그냥 평생 그리워해야 하는 것인데. 


아름다운 섬을 보며 아빠는 할머니를 생각하고, 나는 그런 할머니를 생각할 아빠를 생각했다. 아빠는 어쩌면 "거문도 백도"가 아니라 "할머니"가 보고 싶으셨을지도 모른다. 그리워하게 되고야 마는 사람을 아직 마음껏 보고 말하고 만지고 사랑할 수 있는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그 사소하고 별것 아니고 당연하게 생각하는 일들이 사실은 시한부라서 정해진 시간동안만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얼마나 쉽게 잊고 사는가. 사는게 바빠서, 다른것이 당장은 더 중요해 보여서, 그냥 나의 부모는 나와 함께있는것이 너무도 당연해서, 아주 조금만 기다려주면 지금 이 중요한것을 다 끝내고 더 잘하겠다고, 우리는 한정된 이 시간을 얼마나 쉽게 생각하며 다른일에 양보하고 있는가. 


 먼 훗날 언젠가, 나도 아빠 엄마가 보고 파지면 우리가 함께 했던 곳 어느 곳인가가 그리워 질지도 모르겠다. 혹은 우리가 함께 가고 싶었지만 가지 못한 곳을 그리운 마음으로 찾게 될지도 모르겠다. 엄마 아빠와 보내는 시간은 모든 순간이 소중하다. 우리가 함께 가는 곳, 함께 먹는 것, 함께 보는 것, 함께 나누는 이야기. 할 수 있는 한 많은 시간을 나누고 싶다. 그래서 우리의 여행이 소중하다. 


노란꽃이 섬 가득이던 거문도. 아름다운 우리나라, 우리섬 여행




어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제사를 집 근처 절로 모셨다고 했다.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꼭 절에 모셔 드리기로 엄마와 약속을 했다는데 그 약속이 지켜지는 날이었다. 제사를 이 집에서 지내니, 저 집에서 지내니 말 나게 하는 것도 싫고, 아빠가 자주 들여다 보기도 쉽게 우리 집 근처의 절로 모시는 것을 친척들도 동의한 결과였다. 효자 아빠는 기분 좋았을 하루. 가족들이 모여 절에 가서 제사도 지내고 인사도 드리고 왔다고 연락이 와서 문득 할머니 생각이 났다. 할머니를 보고 싶어 하던 거문도에서의 아빠가 떠올랐다. 이제 자주자주 할머니를 만나러 갈 수 있을 테니 아빠는 행복하겠다 싶어 마음이 좋다. 나는 해외에 있는 탓에 함께 하지 못했지만 이 글 한편으로 나도 할머니를 많이 생각하는 하루였다고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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