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끔 넘어져도 다시 씩씩하게 일어나서 살아보자.
최소 천명, 아니 적어도 만 명쯤. 확신한다. 내 인생의 통째로 바뀌던 그날, 내 인생만 바뀌지 않았다. 지금도 해마다 ‘하필 그날’ 발이 꼬인 꿈들이 고꾸라진다. 더러는 날개를 달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 그날 수많은 꿈들이 현실에 닿는 길이 뒤섞인다. 20년 전에도, 10년 전에도, 올해도 그럴 것이다.
10년 동안 한 번도 바뀌지 않던 어릴 적 장래희망은 ‘치과의사’였다. 어린 나이에도 적어낸 글자에 닿는 길이 쉽지 않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간절한 만큼 진지했다. 오랫동안 한눈팔지 않고 걸어온 덕분에 마지막 관문만 무사히 통과하면 되었다. 요행을 바라지도 않았다. 늘 해오던 그만큼이면 됐다. 수능시험 당일, 어색한 자리에서 시험을 기다리는 마음에는 긴장과 설렘이 뒤섞여 있었다. 꿈꾸던 세상에 갈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1교시 언어영역. 가장 좋아하고 자신 있는 과목을 첫 교시에 만나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듣기 평가가 끝나고 얼마지않아 양쪽 귀가 먹먹해졌다. 목구멍 안쪽에서 뒤통수 전체를 아주 무겁게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잔뜩 긴장했던 근육에서 순식간에 힘이 풀리듯이 몸이 흐무러졌다. 심해의 바닥까지 의식이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졸면 안 돼, 자면 안 돼” 이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깨어났을 땐 이미 15분이 지난 후였다. 벼락 맞듯 깨어난 의식을 덮친 건 당혹감이었다. 다른 때도 아니고 수능 시험 중에 자다니 내가 무슨 짓을 한 걸까. 가뜩이나 부족해진 시간에 자책이 더해지니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가장 자신 있는 과목을 망치자 나머지 과목도 줄줄이 쓰러졌다. 15분은 10년의 소망을 어디론가 보내버렸다.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상심의 크기가 작지 않았다. 쉽게 털어내지 못하는 방황이 길었다. 나에 대한 실망, 제도에 대한 억울함, 세상에 대한 원망이 울화가 되어 시도 때도 없이 치받쳤다. 1년을 더 해보라는 말에 구역질이 올라왔다. 똑같은 일이 일어나면 어쩌란 말인가. 노력 같은 것에 상관없이 애초에 타고난 팔자대로 된다는 비관이 따라왔다. 메디컬 드라마를 꿈꾸던 인생은 어드벤처 드라마로 흘러갔다. 하숙 생활 한번 한 적 없던 나는 취업과 동시에 집을 떠났고, 한국을 떠도는 것도 모자라 이 나라 저 나라에 정착했다 떠돌기를 반복했다. 6개의 대륙 위에 40개가 넘는 나라를 거치며 집시부터 왕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알고 있는 세상과 추구하던 가치는 새로운 현실 앞에서 날마다 깨어지고 다시 세워지기를 반복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수능 시험날 나는 잠깐 기절했던 것 같다. 어린 나이에 집요하게 한곳만 바라보는 내게 신이 아픈 배려를 한 것 같기도 하다. 더 큰 세상을 보라고. 간절했던 무언가를 얻지 못했지만 세상이 끝나진 않았다. 오래 자책했던 실패도 살면서 겪는 경험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도 이젠 안다. 그날의 실패 덕분에 어쩌면 더 재미있게 살았다고 생각하기까지 다시 10년이 걸렸다. 가끔은 ‘그때 의사가 됐으면 어쩔 뻔했어’라는 생각까지 한다. 인생을 평가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것을 배우기까지 참 오래 걸렸다.
인생이라는 경기장이 얼마나 큰지, 얼마나 많은 코너가 있는지 여전히 모른다. 얼마큼의 직선거리 뒤에 다음 코너가 나오는지도 알 수 없다. 그저 직선 코스에선 전력 질주를 하고 느닷없는 맞닥뜨리는 커브에서는 그때그때 대처할 수밖에. 동계 올림픽에서 한국인들이 유난히 열광하는 쇼트트랙을 생각한다. 코너링을 재도약의 기회로 삼는 선수들처럼 겁내지 않고 돌아볼 생각이다. 안쪽에 바짝 붙어 영리하게 파고들어 보기도 하고, 아웃코스로 크게 치고 나가 더 힘차게 돌아보기도 하면서. 그저 포기하지 않고 달릴 생각이다. 여전히 가끔씩 흔들리고 때때로 넘어진다. 그래도 속절없이 무너져 오래 주저앉아있던 어린 시절보다 조금 더 빨리 일어나 균형을 잡는다. 이렇게 조금씩 늘고 있다.
해마다 수능 시험 날이 되면 나는 간절한 마음이 된다. 행여 올해 넘어진 어린 마음들이 있다면 너무 크게 아프지 않길 바라면서. 그건 그저 긴 인생에서 만나는 하나의 코너일 뿐이라는 것을, 오랜 시간이 걸려 깨달은 비밀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