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로성장 Aug 17. 2021

도깨비시장


한남동 도깨비시장.

한남대교를 강북으로 건너다보면 왼쪽 산. 꼭대기에 교회가 보인다.

그곳이 내가 거의 30년 정도를 산 나의 고향이다.

아빠는 소 씨. 엄마는 임 씨. 나는 이 씨. 사람들은 아빠를 할아버지라 불렀고, 엄마도 나이가 많았다.

동거인으로 이루이진 가족의 구성. 내가 언제부터 그곳에서 살았는지 정확히는 나도 모른다.

너무 가난해서 엄마가 시장에서 배추를 주어다 겉절이를 하고, 국을 끓여먹을 때도 있었고,

엄마가 남의 집 파출부라도 몇 시간 가야, 학교 등록금과 전과라도 하나 사볼 수 있었다.


국민학교. 중학교를 다니면서도 학원 한번 가본 적이 없다.

먹고살기 바빴던 우리 집은 나의 공부를 봐줄 사람도 없거니와, 학원은 그야말로 사치였다.

피아노를 다니는 친구 따라, 피아노 학원에 갔었다. 친구가 너무 멋져 보였다. 부러웠다.

그래서 엄마에게 피아노 학원 한 번만 다니게 해 달라고..... 울며불며 며칠을 졸랐지만, 뻔한 결과였다.


다행히 나에게는 동네 친구들이 있었다. 지금도 나에게 큰 힘이 되는 평생 친구들이다.

그러나 그때는, 잘 놀다가도 한 번씩 나에게 '너는 주어온 아이'라며, 놀림감이 되기 일쑤였다.

울고 불며 엄마한테 달려가 이르곤 했지만, 그 동네에서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건 나뿐이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른다. 마음에 휑 한 큰 구멍 하나 달고 사는 기분으로 살았다.


어릴 적부터 '너는 무조건 여상 가서 고등학교 졸업하면 돈을 벌어와야 한다'라는 말을 귀에 딱지 않게 듣고 자랐다. 공부는 언감생심, 여상 가서 졸업하면 돈을 벌어와야 산다. 이미 세뇌당한 나는 공부랑은 거리가 멀었고, 당연히 여상에 들어갔다. 여상에 들어가니, 공부 안 한 친구들이 많았다. 처음 성적표 치고 등수가 중간쯤 나왔다. 나보다 공부 안 하는 친구들이 많았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었다.


취업을 하기 위해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담임선생님의 압박이 들어왔다. 생전 처음 겪는 일이었다. 취업을 하려고 해도, 전교에서 30% 안에는 들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냥 취업이 아니고 열심히 공부를 해야 취업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평소에 공부 안 하던 나를 수업 시간에 집중하게 한 유일한 이유였다. 나는 연로한 부모님을 대신해서 돈을 벌어야 하는 가장이니까. 어쩔 수가 없었다. 위기감이 들었다.


시험 기간에는 벼락치기라도 무조건 밤을 새워서 공부했고, 나름 성과도 좋았다. 취업을 위해 배워야 하는 주산. 부기. 타자 3종의 학원은 엄마가 열심히 파출부를 하면서 다닐 수 있었다. 취업은 우리 가족 모두의 희망이었으니까 어쩔 수 없었을 선택이었다. 비록 지금은 아무 쓸모없는 것이지만 말이다.

3학년 졸업반이 되면서, 취업을 위해 서류를 내야 했는데, 나는 그것이 없었다.

호적등본.

주민등록등본은 있는데 호적이 없었다. 나를 데려다 2년간 키워준 양부모님이 파양을 하면서 내가 공중에서 사라져 버린 사람이 된 것이다. 그때까지도 몰랐다. 2년간 키워준 양부모님이 있는 줄은....


없는 살림에 엄마는 호적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고 이리저리 돈을 빌려 변호사를 사서 엄마 밑에 법적 자식으로 등록시켜주셨다. 이미 엄마를 엄마라 부르고 살았기 때문일까? 큰 감흥은 없었다. 오히려 친구들이 성씨가 바뀐 나를 어색해했다.


입사 필기시험은 늘 합격했지만, 면접에서 계속 떨어졌다. 외모가 날씬하거나 예쁘지 않았다. 성적이 나보다 못했어도, 키 크고 예쁜 아이들은 금방 취업이 되었다. 외모가 나의 앞길을 막았다. 10번이 넘어가니 화가 났다. 내 안에 나도 모르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버스를 타고 가다 입금원 모집 글을 봤다. 종점에서 내려 무작정 버스회사로 들어갔다. 급했었나 보다. 출근하면서 이력서를 써오라 했다. 난 그렇게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