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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성장 Aug 16. 2023

공장 다니는 딸


일하고 있는 중에  엄마가 회사에 말도 없이 왔다. 19살 미성년자인 내가 '정말 안전하게 취업을 했는가'에 대해 궁금했나 보다.  당시 보광동 종점에 있는 큰 버스회사는 동네 주민이라면 모두 아는 곳이었다. 버스를 타기 위해  미리 가서 줄을 서있거나 버스에 타서 기다렸다. 넓은 앞마당에 버스들이 4,50대 줄을 지어 서 있었고 주유하는 곳, 차량 정비하는 곳과 4층으로 된 넓은 건물이 있었다. 그렇게  시설이 좋은 곳은 아니었지만 81번 종점은 늘 사람들의 눈에 띄게 시끌벅적한 곳이었다. 당시 63세 노모는 그곳을 '공장'이라 불렀다.  


엄마는 33년생이다. 그야말로 남들이 말하는 할머니와 엄마를 합한 '할맘'이다. 엄마는 전북 이리 출신으로 본인이 왕성하게 일할 때는 일반 사무실보다 공장에 주로 다녔다. 그래서 회사보다 공장이라는 단어가 더 가까웠는지 모른다. 내 눈에 버스회사가 보기에도 공장처럼 보였다. 엄마는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딸이 동네 버스회사에 취직을 했다고 하니 어떻게 일하는지 당연히 궁금했을 것이다. 



"내일은 공장 가냐?"


나는 여상을 다니고 있었다. 여상을 다니는 딸에게 공장가냐니! 상고를 공고로 순식간에 바꾸는 일이었다. 엄마가 사람들에게 공장 다닌다고 하는 말이 '공부를 못해서 공장 다니는 사람'으로 비추어지는 것 같아 괜한 자격지심이 들었다. 아빠의 말처럼 어디 식모를 보내던지, 공장에 보내서 돈이나 벌어오는 사람이 되기 싫었다.



"공장 아니라고! 회사라고! 왜 자꾸 나를 공순이로 만들어."


 말투 때문인지 딸에 대한 걱정은 원망 섞인 말로 되돌아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세대 차이'어서 생긴 일인데 나는 무척이나 섭섭했다. '엄마가 아빠와 같은 생각을 하는구나'라고 지레짐작했었다. 



이후 치과병원과 한방병원을 다닐 때에도 엄마의 공장 사랑은 계속되었다. 

"엄마 이번엔 공장 아니고 병원이라고 병원!"

매번 말을 할 때마다 정정을 해주던 나는 거의 포기 상태에 이렀다. 속상하기도 했다. 왜 자꾸 공장이라고 하는 걸까? 나는 사람들에게 공장 다니는 사람으로 불리고 싶지 않았다. 공장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아빠에게 들어왔던 말이 상처가 되었던 것이다. 


회사를 다닌 경력이 올해로 25년쯤 되었다. 25년 동안 4-5개의 회사를 다니며 버텨 냈다. 재미있기도 힘들 때도 있었다. 올해처럼 처음으로 남의 돈을 벌어다 주는 일이 싫을 때가 없었다. 직장도 권태기가 있다. 그 시기를 잘 넘기면 또 몇 년 다니는데 이번엔 꽤 힘들었다. 오래전부터 책을 쓰고 싶다는 꿈을 이루고 싶었다. 일을 하기 싫었다. 코로나 시대에 배부른 소리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번이 아니면 정말 꿈을 이루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했던 걸로 충분하다. 과감하게 사표를 냈다. 이번엔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해 도전해 볼 것이다.





나에겐 25년간의 경력이 남았고 경험이 쌓였다. 그것으로 무얼 할 수 있는지는 찬찬히 생각해 봐야겠다. 엄마의 말대로 공장 경력이 지속이 될지 어떨지는 나도 아직 모르겠다. 일단 꿈에 도전한다. 



한 달 전까지 회사를 공장이라고 칭하는 엄마를 보며 '회사는 곧 공장'이라는 공식을 인정하기로 했다.  

나는 이제 공장에 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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