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우주에서 온 암흑의 신이다. 지구인들이여, 얌전히 멸망하라.
비행접시에서 내려온 문어 모양의 우주괴수는 순식간에 뉴욕시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높이가 5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괴수는 기묘한 억양으로 녹음된 영어로 말했다. 빨갛게 빛나는 수십 개의 눈에서 발사된 빔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단번에 날려버렸다. 미공군이 출동해서 수백 발의 미사일을 쏘아댔지만 끄떡도 없었다. 오히려 파리라도 쫓아내듯 촉수를 몇 번 휘둘러 순식간에 전투기를 추락시켰다.
그와 같은 시각 한국의 서울도, 중국의 북경도, 일본의 동경도 같은 모양의 괴수에게 습격당하고 있었다. 중국의 자원독점과 영토분쟁으로 막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태세를 갖추던 미국, 한국, 일본 등 주요 국가의 지도자들은 태국 파타야에 모여서 긴급회의를 열었다.
“지금 우리 인류끼리 싸울 때가 아닙니다. 각국이 힘을 모아서 저 괴수를 퇴치하지 않으면 인류에게 미래란 없습니다.”
“적국인 당신들과 손을 잡기는 싫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어쩔 수 없지. 일단 인류가 살고 봐야 하니까. 기꺼이 힘을 보태겠소.”
중국의 최고지도자가 말했다.
“핵무기를 써 볼까요?”
“그건 방사능 때문에 안 됩니다. 차라리 지구방위대를 파견합시다.”
“지구방위대라면 15년 전에 나타난 검은 날개 괴수와 5년 전에 지상을 점령했던 심해괴수를 퇴치한 한국의 슈퍼히어로 콤비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미사일도 통하지 않는 지금, 핵무기 말고 저 거대한 괴물을 퇴치할 수 있는 존재는 지구방위대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도와달라는 신호를 보내지요?”
“간단합니다. 지난번 위기 때와 마찬가지로 어린 여자 아이가 저 괴수에게 짓밟히려는 순간, 어김없이 그들이 나타나지요.”
“그렇다고 가엾은 어린아이를 인질로 쓸 수는 없지 않을까요?”
“물론입니다. 그래서 저희 일본은 어린 아이와 똑같이 생긴 안드로이드를 만들어서 현장에 파견하겠습니다.”
화사한 나들이복을 입은 7세 소녀가 뉴욕거리를 아장아장 걸어 다녔다. 사방에서 빌딩의 부서진 파편이 튀고 전투기가 추락했지만 소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태엽을 감은 인형처럼 그저 앞으로 걸어 갈 뿐이었다. 마침내 괴수의 눈에 소녀가 감지되었다. 괴수는 촉수 중 하나를 휙 들어 올리더니 끝에 있는 세 발톱을 오므려서 날카로운 창처럼 만들었다. 그리고 소녀를 향해 가차 없이 그것을 날렸다.
퍽!
그러나 촉수가 꿰뚫은 것은 소녀가 아니었다. 어디선가 등장한 가면을 쓴 남자가 촉수를 튕겨냈던 것이다. 촉수에 맞은 옆 빌딩이 고목처럼 쓰러졌다.
“흥, 나는 지구방위대원인 불꽃의 철이다. 어린 아이를 괴롭히는 괴물은 정의의 이름으로 용서치 않는다.”
괴수는 대답 대신 다른 촉수를 하나 들더니 끝에 있는 세 발톱을 벌렸다. 그리고 한가운데에 있는 구멍에서 광선을 쏘다대었다. 콰콰콰쾅! 순식간에 일대가 파괴되며 먼지가 피어올랐다.
“죽어랏! 괴물!”
어느 샌가 광선을 피한 철이가 소녀를 한 손에 안은 채 괴수의 뒤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점프라기보다는 비행에 가까운 묘기였다.
“이얍! 아예 주꾸미 구이를 만들어 주지!”
철이의 팔에서 엄청난 불길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놀랍게도 문어 괴수는 주전자 주둥이처럼 생긴 입에서 냉기를 뿜어내며 맞섰다.
“이…… 이럴 수가 내 불꽃을 막아내는 녀석이 있었다니!”
괴수가 뿜어내는 냉기가 점점 더 강해지더니 철이의 불꽃이 조금씩 밀리는 형국이 되었다. 철이가 한 팔에 알고 있는 소녀의 머리카락에 하얗게 서리가 내리기 시작했다.
“내가 도와줄까?”
어디선가 세라복 차림의 미소녀가 공중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바람의 소녀 영이! 부탁해!”
“좋았어!”
영이가 정신을 집중시키자 철이의 시야에서 괴수가 갑자기 훅 부풀어 오르듯이 커졌다. 공기의 원소를 조종하는 영이가 주변 부분의 공기밀도는 낮게 하고 중심 부분의 공기밀도는 높게 해서 일종의 볼록렌즈와 같은 효과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철이가 뿜어낸 불꽃은 마치 태양광선이 돋보기로 모이듯이 한 점으로 집중되더니 무서운 힘으로 괴수의 몸통을 파괴했다. 순식간에 거대한 괴수는 산산조각이 나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역시 지구방위대야! 어떤 괴수도 둘이 힘을 합치면 상대가 안 되는군!”
“철이! 영이! 우리는 너희만 믿는다!”
시민들의 환호소리를 뒤로 한 채 철이와 영이는 하늘 저편으로 유유히 모습을 감추었다.
“…… 이번 사건을 계기로 세계 각국의 정상들은 평화협정에 사인을 했으며 인류가 힘을 합쳐 난관을 극복해 나갈 것을 다짐했습니다. 이에 우리 정부는…… 치칙.”
김 박사는 리모컨을 눌러서 TV를 껐다. 그는 인류가 멸망의 위기에 처할 때마다 출동하는 지구방위대의 총책임자였다.
“박사님 이번에도 잘 해결되었나요?”
막 샤워를 마친 철이가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며 걸어왔다. 25살에 시작한 슈퍼히어로 생활이 벌써 15년차였다. 출동할 때는 메이크업으로 감추고 있었지만 벌써 마흔 줄에 접어든 철이의 눈가에도 잔주름이 자글자글했다.
“그래, 이번에도 무사히 위기를 넘겼구나. 수고했다. 하마터면 온 인류가 멸망할 뻔했어.”
김 박사는 모니터를 바라보며 말했다. 모니터에는 온갖 종류의 괴수들이 게임 캐릭터처럼 늘어서 있었다. 방금 퇴치한 문어 모양의 우주괴수는 왼쪽에서 3번째에 있었다. 박사가 그것을 클릭하자 괴수가 빨갛게 변하면서 X표시가 떴다. 그리고 그 밑에는 ‘terminated(퇴치되었음)’이라는 글자가 깜빡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인명피해가 너무 많았어. 무려 5만 명이나 사상자가 나왔다니 마음이 무겁구나.”
“하지만 인간들끼리 핵전쟁을 벌이다가 멸망하는 것 보다는 낫잖아요? 괴수라는 공통의 적이 있어야 인류가 단결하니 어쩔 수 없지요.”
어느새 흰 티셔츠와 꽃무늬 수면바지 차림으로 등장한 영이가 말했다.
“하긴 그게 우리의 존재 이유지.”
김 박사는 아직도 수십 개나 남은 괴수 리스트를 보며 중얼거렸다.
“다음 위기 때는 어떤 괴수를 출동시킬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