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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의 후예

by 아이디어셀러

“태고적부터 그래왔지만 말이야…….”


타악. 소주잔 바닥으로 갈비집의 원형테이블을 때리며 태웅은 운을 떼었다.


“세상은 정말 불공평하단 말이지.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고? 흥, 웃기지들 말라 그래. 새는 나는 재주가 있다고. 구르는 놈이 나는 놈을 무슨 수로 이겨.”


나와 황태웅은 S물산 입사동기였는데 부서가 달라서 단체회식 때 몇 번 술을 같이 마셨을 뿐 그 이상 친밀한 관계는 아니었다. 회사 구조조정 차원에서 다음 달부터 지방으로 발령이 난 태웅은 마음이 잡히지 않는지 벌써 며칠째 아무나 붙잡고 회사 근처 술집의 알코올을 동을 내고 다녔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태웅이 술값을 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태웅이 술값을 안낸 이유가 오로지 그의 말빨 때문이라고 했다. 누구든 천일야화처럼 풀어내는 그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술값을 치르지 않고는 못 견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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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컬한 일이다. 이름표를 손바닥으로 가리고 있어도 처음 본 누구나가 대번에 이름을 알아맞힐 것 같은 곰처럼 미련퉁퉁한 외모에 항상 남보다 한 템포 늦는 굼뜬 동작 때문에 과장한테 깨지기 일쑤이던 그에게 이런 재주가 있을 줄이야. 그런 구르는 재주라면 어설프게 나는 재주보다야 나으리라. 술잔이 거듭될수록 나의 정신은 흐려지기는커녕 더욱 더 안테나처럼 예민해졌다.


“김 대리, 자네 혹시 단군신화를 아나?”


이제 슬슬 시작되려나 보군.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어디 한 번 내 지갑도 열게 해 보라지.


“그야 대한민국에서 단군신화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 리가 있나? 곰과 호랑이가 굴속에서 쑥과 마늘만 먹고 100일간 지내다가 호랑이는 못 견디고 도망치고……”


“내……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쯔쯔.”


태웅이 손사래를 치며 말을 잘랐다.


“내가 묻는 건 ‘진짜 단군신화’를 아느냐는 거야.”


“진짜 단군신화? 그럼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이 잘못된 것이란 말인가? 새로운 환단고기라도 발견되었나 보지?”


“생각해 보게. 중국을 상징하는 동물은 팬더지. 호주를 상징하는 동물은 캥거루고. 그럼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동물은 뭐지?”


“음…… 그야 호랑이 아닐까? 88올림픽 마스코트이기도 했고.”


“바로 그거야! 우리가 단군신화대로 호랑이의 후예가 아니라 정녕 웅녀의 후예라면 응당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동물은 곰이어야지 왜 호랑이겠나?”


“으음? 그야 뭐…… 어차피 옛날이야기는 옛날이야기이니까…… 옛날이야기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인다는 게 난센스 아닌가? 곰이나 호랑이니 하는 것도 실제 동물이 아니라 곰 토템과 호랑이 토템을 섬기던 부족을 상징한다는 것도 학계의 정설로 굳어졌고 말이야.”


“아니야, 여기엔 커다란 비밀이 숨겨져 있다네.”


이제부터 장장 긴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듯 태웅은 반쯤 탄 고기 한 점을 집어넣더니 다시 소주 한 잔을 목구멍에 털어 넣었다. 감기약이라도 먹듯 가볍게 가볍게 고기를 없애나가고 있었다. 나는 어느덧 내 앞에 모셔다 놓은 갈빗살이 타는 것도 잊고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고 있었다.


“사실 곰과 호랑이의 내기(?)는 공정한 게임이 아니었어. 생각해봐. 곰은 잡식성 동물이고 호랑이는 육식성 동물이지? 근데 환웅이란 놈이 던져준 음식은 쑥과 마늘이었단 말이야. 애초부터 호랑이가 이길 수 있는 게임이 아니었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80일까지 참고 나가버린 호랑이를 참을성이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 육식동물이 쑥과 마늘만 먹고 그 정도를 버틴 것만 해도 기적이지.”


“흐음…… 그래서?”


“그래, 쑥과 마늘을 먹다먹다 지친 호랑이는 어떻게 했을 것 같나?”


“그야 뭐……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견디지 못하고 동굴 밖으로 도망을 쳤겠지. 이렇게 말하면 자네는 또 아니라고 말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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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냐 아냐, 자네는 아직 호랑이란 동물을 잘 모르고 있군. 비록 우화 속이긴 하지만 호랑이는 강력한 앞발과 이빨을 가진 맹수 중의 맹수란 말이야. 사실 동굴 속에 호랑이의 먹이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거든”


“그럼?”


“곰이야! 바로 곰이라고!”


“!!!”


“동굴 속에 갇힌 호랑이는 환웅의 눈을 피해 곰을 잡아먹어 버렸어. 그리고 곰의 가죽을 벗겨 자기가 뒤집어쓰고 환웅 앞에서 웅녀인 척 했던 거지. 물론 호랑이는 중간에 도망갔다고 거짓말을 하고. 자, 이제 알겠나? 어째서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동물이 곰이 아니고 호랑이인지.”


“그렇담 자네 말대로라면 우리는 모두 웅녀의 후예가 아닌 호랑이의 후예란 말인가?”


“정확하게는 나는 빼 주게. 호랑이의 배신 때문에 끝끝내 인간이 되지 못한 곰 족속은 내분이 일어났다네. 한 쪽은 숲에서 그냥 꿀과 물고기를 먹으며 동물로서의 삶을 살자는 입장이었고 다른 한 쪽은 어떻게든 인간의 무리 속에 들어가서 언젠가 이날의 복수를 하자는 입장이었어. 자네, 곰이 사람으로 변신한다는 신화는 어디선가 많이 들어봤지? 캐나다 인디언의 아스디왈 신화에서 곰은 여자로 변신하고 다른 많은 신화에서 곰은 인간과 가장 유사한 동물로 등장하지. 그게 바로 후자 쪽 무리들이 노력에 노력을 거듭해서 인간처럼 진화해간 케이스야. 유인원이 고릴라와 호모사피엔스로 갈라지듯 곰의 후예도 독자적인 진화노선이 갈라져 나온 거지.”


“그렇다면 이 순간에도 진화한 곰들이 인간의 무리에 섞여 있단 말인가?”


“맞아. 곰들은 스스로의 자신의 털과 발톱을 뽑아내고 인간의 말을 흉내 내는 등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인 결과 인간의 모습을 닮는 데 성공했네. 하지만 아무래도 야생의 동물이었던 지라 100% 인간과 똑같이 될 수는 없었어. 아무래도 동작이 무디고 거칠었지. 자네는 주위에서 ‘곰 같은 녀석’이라든지 ‘미련곰퉁이’란 말을 많이 들어 봤을 거야. 그들은 모두 실상은 인간이 아니라 진화한 곰의 후예들이네. 반만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곰 인간들은 인간세상에서 차별대우를 받고 있지. 구조조정자라든지 명예퇴직자의 70%는 곰 인간들이라도 봐도 좋네. 안타까운 일이야. 복수는커녕 비극의 악순환이라니. 이제 알겠나? 내가 처음에 태고적부터 세상은 불공평하다고 말한 이유를.”


“그러니까 자네가 바로……?”


“더 긴말 않겠네. 우리 곰의 후예들은 인간세상에서 차별과 핍박을 받을 만큼 받았네. 이제 더 이상 잃을 게 없어. 그런 의미에서 이번 술값은 자네가 한 번 내는 게 어떻겠나? 축복받은 호랑이의 후예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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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웅은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를 챙겨 입었다. 내 오른쪽 물수건 옆에는 5만 7천 원이 적힌 영수증이 놓여 있었다. 얼핏 보니 그의 양복 엉덩이 꼬리뼈 부근이 볼록 솟아오른 게 뭔가 꼼틀거리는 듯도 했다. 나는 말없이 웃으며 지갑을 꺼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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