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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

by 아이디어셀러

평범한 시내 인문계 고등학교의 5교시였다. 지난주에 수학여행을 다녀온 데다 창밖에 비까지 내리고 있어서 도저히 수업을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피곤에 절은 아이들이 여기저기 해초처럼 널브러졌다.


“혹시 예전에 배웠던 평행우주 기억하나요?”


과학을 가르치는 김 선생이 필기를 하다 말고 교실을 둘러보았다. 살아남은 시체 몇 구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평행우주론은 뉴욕 시립대학교의 미치오 카쿠 교수가 끈이론에 근거를 두고 창안했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는 순간 가능성의 우주가 동시에 생겨난다는 이론이죠. 예를 들어 지난주에 여러분들은 수학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하마터면 큰 사고가 날 뻔했죠? 평행우주론에 따르면 그 순간 사고가 난 우주와 사고가 나지 않은 우주라는 두 개의 평행우주가 생겨납니다. 그 중 우리는 운 좋게도 사고가 나지 않은 우주에 살고 있는 것이죠.”


오오…… 아이들이 소름이 돋은 팔다리를 비벼댔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실장이 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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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비도 오는데 무서운 이야기 해 주세요.”


아이들이 여기저기서 박수를 치며 동조했다.


“좋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오늘은 평행우주와 관련된 무서운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지요. 아마 이런 비슷한 유의 괴담은 많이 들어봤을 겁니다.”


김 선생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는 짜증이 났다.


낮부터 운수가 사나운 날이었다. 빗길에 미끄러진 화물차가 중앙선을 넘어와서 하마터면 식겁을 하질 않았나, 모처럼 태운 손님은 온몸이 흠뻑 젖은 채 뭐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리질 않나. 아직 회사 납입금도 채우지 못했는데 저런 기분 나쁜 여자라니 재수 옴 붙었다. 미역처럼 검고 긴 생머리가 하필 가슴께에 달라붙어서 좋은 구경거리도 놓쳤다. 거 우산도 안 쓰고 다니나. 가죽 시트 다 젖을 텐데.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미간에 세로 주름을 새겼다.


“어디까지 가신다고요?”


여자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조그맣게 ‘잠실동 장미아파트 105동이요’라고 속삭였다. 어디서 이빨 빠진 할머니가 도토리묵을 쳐드시나. 남자는 속으로 짜증을 내며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자는 무서웠다.


“저기, 아저씨 안 들리세요? 장미아파트 105동으로 가 달라니까요?”


기사는 여전히 아무 대답도 없었다. 잔뜩 화가 난 듯한 표정으로 전방만 주시했다. 와이퍼가 뿌득 뿌득 이 가는 소리를 내며 쉴 새 없이 투신하는 빗방울을 쳐내고 있었다. 젖은 몸이 오슬오슬 떨려왔다. 여자는 양 손으로 팔꿈치를 감싸 쥐며 터져 나오려는 오한을 틀어막았다. 힘겨웠던 날이었다. 어서 집에 가서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쉬고 싶었다. 여자는 룸미러로 흘깃 택시기사의 표정을 살폈다. 남자의 한 쪽 뺨에 빨간 핏줄기가 흘러 내렸다. 수동식 기어를 틀어 쥔 손에서도 깨진 손톱 밑으로 진득한 핏방울이 뚝 뚝 떨어졌다. 아무래도 불안하다. 여자가 막 내리려고 손잡이에 손을 뻗는 순간 택시가 맹렬한 기세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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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자꾸 뒤쪽이 신경 쓰였다. 룸미러에 보이는 여자는 ‘링’에 나오는 사다코처럼 고개를 숙인 채 택시의 진동에 맞춰 규칙적으로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저기…… 옷이 다 젖었는데 춥지 않으세요? 히터라도 좀 틀어드릴까요?”


여자는 대꾸가 없었다. 남자는 더 묻지 않고 히터 대신 라디오를 켰다. 침묵이 불편하다기보다 불안했다. 이럴 때는 라디오만 한 것이 없었다.


“…… 치직…… 치지지…… 오늘 낮 4시 30분경 한 여성이 한강대교에서 강물로 투신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수색작업을 벌이고 있으나 시신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경찰에 따르면 최근 사귀던 남성과 헤어지고 처지를 비관하던 여성이 자살을 시도한 것으로 보고 정확한 경위를 조사하고 있습니다…….”


운전대를 잡은 남자의 손등에 두드러기가 돋았다. 그러고 보니 여자가 탄 곳도 한강대교 근처였다. 저 여자는 도대체…… 섬뜩한 느낌이 들어 룸미러를 보았다. 여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자는 라디오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비가 와서 그런지 잡음이 심해서 잘 들리지 않았다.


“…… 치직…… 치지지직…… 오늘 낮 4시 30분경 택시 한 대가 한강대교 위에서 중앙선을 넘어오던 화물차와 정면충돌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택시기사는 그 자리에서 숨졌으며 화물차 운전기사는 중태에 빠졌습니다. 현장을 연결해 보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택시를 잡은 곳이 하필 한강대교 부근이었다. 밤이라서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차 문이 살짝 찌그러져 있었던 것도 같았다. 아까부터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간신히 살아 돌아온 하루였다. 믿었던 남자에게 배신당한 서러움에 한강에 몸을 던지려다가 마침 순찰 중이던 경찰들의 설득에 마음을 돌렸던 것이다. 여자는 룸미러를 통해 남자를 보았다. 부릅뜬 눈에서 흘러내린 핏물이 남자의 허벅지를 적시고 있었다.


“으아아아아악!”


자는 비명을 지르며 급정거를 했다. 빗물에 미끄러진 타이어가 비명을 질러댔다. 택시는 가로수를 들이받기 직전에 간신히 정지했다.


“왜…… 그러…… 시죠……?”


뒷좌석의 여자가 느릿느릿하게 말을 내뱉었다. 말을 할 때마다 턱밑으로 물이 줄줄 흘러 내렸다. 강물 특유의 비린내가 차 안에 진동을 했다.


“어서…… 가 주세요…… 잠실동 장미아파트…… 105동…… 가야 해요…….”


여자는 고개를 숙인 채로 같은 말만 반복했다. 핸들을 쥔 남자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문을 열려고 했지만 잠금장치가 망가졌는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택시 안에 갇혀버린 것이었다.


“잠실동 장미아파트…… 105동 가야 해요…… 어서 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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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앞머리 밑으로 드러난 여자의 볼 살이 허옇게 물에 불어 있었다. 입술은 시커먼 먹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여자와 눈이 마주치기 직전, 남자는 고개를 돌렸다.


“알았어, 갈게! 가면 될 거 아냐! 제기랄!”


남자는 여자를 시트에 파묻기라도 할 기세로 있는 힘껏 액셀러레이터를 때려 밟았다.

“꺄아아아아악!”


자는 겁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


“아저씨! 내려 주세요, 네? 제발 내려 주세요.”


그러나 남자는 들은 척도 안 했다. 오히려 핸들을 좌우로 꺾어대며 난폭하게 운전을 했다. 핸들을 돌리는 남자의 손목에서 하얀 뼈가 피부를 뚫고 튀어나와 있었다. 핸들을 돌릴 때마다 간신히 팔에 매달린 손목이 덜렁거렸다. 여자는 달리는 차 문을 열고 뛰어내리려고 했다. 그러나 속도가 높아진 차 문은 자동으로 잠겨서 열리지 않았다.

“아저씨 도대체 왜 이러세요? 일단 멈춰 봐요. 아저씨 팔이 부러졌다고요!”


남자는 운전을 하면서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뿌드드드…… 뿌드드드…… 뼈가 뒤틀리는 끔찍한 소리가 여자의 고막을 긁었다. 90도…… 120도…… 150도…… 믿을 수 없게도 몸은 앞을 향한 채 남자의 목은 정상적인 가동범위를 넘어 180도로 뒤틀렸다. 남자의 목에서는 계속 뼈가 부러지는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의 등 위로 막 남자의 얼굴이 나타나는 순간 여자의 눈앞에 불빛이 번쩍 했다.


“꺄악! 아저씨 앞을 보세요!”


마주 오던 트럭이 택시의 백미러를 치고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도착…… 했습니다…….”


자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여기까지 어떻게 달려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온 힘을 다해서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더니 발목이 시큰거렸다. 그래도 아파트 단지에서 쏟아져 나오는 밝은 불빛을 보니 안심이 되었다. 이렇게 대낮같이 밝은데 무슨 일이야 있겠어. 여차하면 소리라도 지르면 되지. 웃고 떠드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니 잠시 잃어버렸던 현실감이 돌아왔다. 아깐 내가 너무 민감했던 거야.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겁에 질렸던 본인의 모습이 우습기조차 했다.


“아저씨…… 죄송한데요. 아까 제가 지갑을 잃어버렸거든요…… 대신 이 반지를 맡기고 금방 집에 다녀올게요…….”


달칵, 뒷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묻는 닫는 진동과 함께 남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는 집에 올라가자마자 얼른 마른 수건으로 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책상 서랍에서 비상금 몇 만 원을 챙겨서 밖으로 나왔다. 그런 무서운 기사 아저씨는 빨리 돌려보내고 싶었다. 아직도 등 쪽으로 얼굴이 돌아가던 기괴한 모습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택시가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것도 없었다. 잘못 본 것이 아닌가 싶어 몇 번이나 주위를 둘러봐도 마찬가지였다. 택시가 있어야 할 곳에는 여자가 맡기고 간 반지만이 비를 맞으며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자는 초조하게 시계를 보았다. 금방 온다던 여자는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냥 가버릴까? 그래도 혹시…… 남자는 여자가 있던 자리를 돌아보았다. 남자는 여자가 맡기고 간 반지를 집어 들었다. 약혼반진가? 꽤 값이 나가 보이는 물건이었다. 남자는 반지를 들고 밖으로 나와서 여자가 뛰어간 쪽을 올려보았다. 그곳에는 노란 상갓집 등불이 걸려 있었다. 희미한 곡소리가 남자의 귓가에 맴돌았다.




김 선생은 이야기를 마치고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원래 분열된 평행우주는 완전히 독립되어 서로 만날 수 없지만 간혹 예외가 있어요. 오늘처럼 비가 오는 음산한 날에는 우주의 주파수 파장이 불안정해져서 평행우주가 교차되기도 하거든요. 그럴 때면 산 자의 우주와 죽은 자의 우주가 교차되면서 살아 있는 사람들이 죽은 사람들, 즉 귀신들을 보는 일도 일어난답니다. 대부분의 괴담의 무대가 비 오는 밤인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지요.”


우오오…… 아이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택시기사에게는 두 개의 평행우주가 있었어요. 하나는 교통사고가 나서 남자가 사망한 평행우주였고 다른 하나는 교통사고를 간신히 피해서 남자가 살아남은 평행우주였죠. 한편 여자에게도 두 개의 평행우주가 있었어요. 하나는 자살을 시도한 여자가 물에 빠져서 사망한 평행우주였고 다른 하나는 여자가 마음을 돌려서 살아남은 평행우주였죠. 이야기 속에서는 비 오는 날 각자의 평행우주가 교차되었던 것입니다. 즉 택시기사 입장에서는 자신이 살아남은 평행우주와 여자가 사망한 평행우주가 교차했던 것이고, 여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살아남은 평행우주와 택시기사가 사망한 평행우주가 교차했던 것이죠. 결국 서로 다른 평행우주의 귀신을 만난 셈입니다. 이야기가 조금 어려웠나요? 그럼 이제 비도 그치고 있으니 수업을 계속 하도록 하겠습니다.”


선생은 칠판에 뚜벅 뚜벅 판서를 하다가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블라인드를 친 것처럼 주위에 푸르스름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왁자지껄하던 아이들의 목소리가 어느 순간 음소거 버튼을 누른 것처럼 조용해졌다. 김 선생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 전까지 아이들이 빼곡하게 앉아 있던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웃고 떠들던 천진난만한 얼굴 대신 작은 화분에 담긴 국화꽃이 놓여 있었다. 아아, 그랬었지…… 너희들은 수학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사고가 나서 모두 죽고 면목 없게도 나 혼자 운이 좋아 살아남았지…… 그렇다면 아까 전 너희들의 모습은 무엇이었니…… 이렇게나 생생한 걸…….


김 선생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느새 비가 그치고 햇빛이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생들은 누구도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김 선생님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국화꽃 한 송이가 고개를 꺾고 있었다. 실장이 울먹이며 대표로 추도문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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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께서는 항상 우리들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수학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도 김 선생님은 우리들을 위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마주 오던 차에게 신호를 보내셨습니다. 간신히 큰 사고를 피하긴 했지만 선생님께서는 돌아가셨고 그분의 희생으로 우리는 살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그립습니다. 언젠가 선생님께서 수업시간에 말씀하셨던 것처럼 평행우주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한 번쯤은 다시 만나 뵙고 싶습니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 언젠가…….”


어느새 비가 그치고 교실에 햇빛이 들어왔다. 아이들이 조심스레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너 그거 알아? 나 방금 잠깐 졸다가 선생님이랑 같이 수업하는 꿈꿨다? 어? 너도? 나도야! 진짜? 나돈데! 혹시 그거 아닐까? 예전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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