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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추모하며

편지로 엮는 나의 삶 : 2018년 10월

by 정재근

농업시대와는 달리 세상이 많이 바뀌어 다들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 서울 상계동 집 기제사에 참석하여 아버지를 추모하고 싶어도 오지 못하는 동생들이 있어, 다 같이 상의하여 기일 전 주말에 산소에서 기제사를 지내기로 하였습니다. 오늘 산소에서 지내는 첫 기제사를 맞이하여 아버지를 추모하는 글을 낭독하고자 하오니 참석하신 모든 분들은 고인을 영모하는 마음으로 삼가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아버지를 추모하며


아버지 두계(豆溪) 정자 승자 기자(鄭자 承자 基자)께서는 1932년 음력 9월 11일 논산시 가야곡면 왕암리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어머니 문화 유경희님과 결혼하여 슬하에 1남 3녀를 두셨습니다. 2016년 10월 17일, 음력 9월 17일 밤 11시 26분 향년 85세를 일기로 대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이곳 가야곡 야촌리 효사재 선영 가족묘에 모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논산 구자곡초등학교, 대건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을 졸업하시고 충청남도청에 근무하시면서 축산진흥과 가축위생분야에서 30년 이상을 헌신하셨습니다. 농업연구관으로 충남 가축위생시험소 남부지소장과 북부지소장을 역임하셨습니다. 현직에 계실 때 가축의 계통출하 통계를 위해 밤늦도록 손을 호호 불어가며 밥상을 펴 놓고 일하시던 모습, 또 한여름 뙤약볕에 90cc 오토바이를 타고 농가 돼지우리를 돌아다니시며 새끼돼지에게 뇌염 백신을 놓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퇴직 후에는 종친회 일에 헌신하셨습니다. 당신의 막내 숙부이신 명동성모병원장을 역임하신 간산 정 환자 국자 박사를 도와 이곳 효사재를 일구는데 큰 기여를 하셨습니다. 하동정씨 익위공파 회장으로서 익위공 휘 광자 조자 할아버지의 모친이신 한양 조씨 할머니와 관련된 자료를 조사하여 종보를 수정하는 등 하동정씨 문성공의 장자로서 익위공과 그 자손의 지위를 찾고자 하는 일에 많은 힘을 쏟았습니다. 이 일은 선친의 동생이신 정 양자 일자 숙부님께서 종친회장을 이어 잘 계승하고 계십니다. 이 자리를 빌려 숙부님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아버지께서는 꾸준히 서예를 연마하시어 다수의 작품을 남기셨습니다. 특히 이곳 가족묘를 조성하고 상석 글씨를 손수 쓰신 것은 선친이 형제간의 우애를 우리에게 가르치시기 위해서라 생각합니다.

지금 선친이 모셔져 있는 이곳 야촌리 효사재 가족묘는 혹 나중에 논산시의 필요에 따라 수용되어 부득이 육곡리 태봉산 익위공파 묘역으로 옮기는 일이 발생할 때까지는 저희들이 힘을 모아 가꾸면서 부모님과 숙부님들을 생각하는 영모의 장소로 또 후손 교육의 장소로 잘 가꿀 것을 다짐해 봅니다.

아버지께서는 생전에 마음속에 품고 살아오신 유지(遺旨)였던 “효우, 근검, 성실, 명예 (孝友, 勤儉, 誠實, 名譽)”를 1996년에 붓글씨로 써서 남기셨습니다. 가훈으로 소중히 간직하고 평생 마음에 잘 새기고 살겠습니다. 이 중 효우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뜻을 받들어 선친의 글씨를 집자하여 효우정이라는 현판을 목각으로 새기어 간직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효자이셨습니다. 할아버지 상례 후 논산 취암동 집에 궤연을 마련하여 1년간 모신 후 탈상하신 것은 당시 공직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탈상 때 오신 손님들께서 그런 아들을 둔 할아버지를 부러워하며 마음으로 칭송하시던 그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물론 어머니의 수고가 없었다면 이 모든 것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어머니 고맙습니다.

그리고 형제간에 우애가 깊었습니다. 제가 느끼기에 아버지의 동기간처럼 자주 왕래하고 상의하며 형은 동생을 동생은 형과 누이를 서로 존중하며 좋아한 집안은 드문 것 같습니다. 덕분에 저는 숙부님, 고모님들과 어렸을 때부터 가깝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 4남매도 이를 본받아 더욱 자주 연락하고 우의를 돈독히 하면서 어머니를 잘 모실 것을 다짐해 봅니다.


아버지의 유지 중에서 명예는 더욱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 글을 쓰신 1996년 병자년 겨울은 아버지께서 은퇴하신 지 5년이 되는 해입니다. 은퇴만 하면 온갖 유혹에 무너지는 작금의 고위공직자들을 보면서 진정한 명예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아버지께서는 은퇴 후에도 늘 명예로운 은퇴 생활을 위해 애쓰신 것 같습니다. 공직자는 모름지기 이러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만, 선친은 퇴직하고 나서 어떻게 살아야 선비의 삶을 사는 것인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공직자 아들을 가진 은퇴공직자가 숙명적으로 지녀야 하는 긍지 반 불편 반이 공존하는 삶이었을 것입니다. 이제 저도 선친께서 사셨던 은퇴 후의 삶을 그 아버지의 아들로 당신처럼 살아가려고 오늘도 온갖 유혹을 뿌리치며 명예를 지키려고 무던히 애쓰고 있습니다.


오늘은 아버지께 반가운 사람을 인사드리려고 합니다. 돌아가실 때까지 늘 마음 한편에 안쓰러움으로 자리하고 있었을 당신의 막내딸 OO이가 좋은 배필을 만났습니다. 따로 잔을 올릴 터이니 늘 보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2018년 10월 21일 일요일

효사재 선영에서 불효자 재근 올림



<유 품>

정재근

에콰도르 출장 중에 산 중절모

나도 할아버지처럼 멋지고 싶었을까

아버지에게서 할아버지를 보고

씌어 드렸다

머리에 맞춰 신문지 말아 끼우고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되었다

유품이 된 모자

안쪽 신문지 빼내고

내가 두 분처럼 멋 부린다

작은 머리 큰 마음

동네에서는 아버지와 그 아버지를

덕인이라 불렀다


@ 2018년 10월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2년이 되는 해이다. 1주기인 2017년 10월에는 상계동 집에서 기제사를 모셨다. 좁은 집에 동생들은 물론 숙부모님을 비롯한 집안 어른들이 많이 오셨다. 그 후 직장생활하는 자손들이 평일 기일에 참석하기 쉽지 않은 여건을 고려하여 기일이 들어있는 주말에 선영에서 모시기로 하였다. 2028년 선영에서 기제사를 모시면서 낭독한 추모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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