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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피 Mar 30. 2023

8. 도망쳐도 괜찮아요

번아웃이 나쁜 것만은 아니야.


인생에서 감당할 수 있는 총량이 있다고 믿는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총량에 다다르면 결국 임계치에서 탄성 계수를 잃고 끊어져버린 고무줄처럼 원래의 상태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다.




Burn out(소진) 증후군
일에 지나치게 몰두하던 사람이 어느 시점에 갑자기 모두 불타버린 연료와 같이 극도의 피로감을 느끼며 무기력해지는 것을 의미하는 현대 사회의 병리적 징후를 표현하는 용어


처음 겪은 번아웃은 시작이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인지하는 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고 깨달았을 때 상태는 꽤 심각했다. 일하기가 싫은 것은 나뿐만이 아니니, 사실 그렇지 않던가. 우울증에 대한 인식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기 때문에 '번아웃'이라는 별도의 상태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낮은 역치로 예민하고 약한 신체에 대한 문제는 몸을 바꿔 낄 수 없는 나 자신과의 길고 긴 싸움이었기 때문에 결국 내가 주도적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내가 몸 담은 '직장' 정도였다. 그때는 그게 해결책이라고 믿었다.


일을 벌이고 나서야 깨달았다. 내가 번아웃이 왔다는 것을. 일을 제대로 하고 싶어서 떠났는데 일을 할 수 없다는 걸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시기가 되어서야 인지하는 최악의 상황에 맞닥뜨렸다. 일하기 싫은 것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터넷에 번아웃 자가 테스트가 몇 가지 있는데 내가 직접 경험한 번아웃의 증상은 다음과 같다.


첫째, 방이 더러워진다. 나를 돌보는 시간이 확연히 줄어든다. 출근길 옷차림과 화장과 머리스타일을 다듬는 많은 것들이 생략되기 시작한다. 나아가 내 영역조차 돌보지 않으면서 방이 점점 지저분해진다. 이것은 게으름의 문제가 아니라 기존에 유지되던 방의 질서가 하나씩 무너지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 과부하로 인해 멈춰버린 사고가 가장 큰 증상이다. 뇌의 용량이 가득 찬 채 에너지가 소진된 상태로 퇴근한 후나 쉬는 날에도 하고 싶은 일이 하나 없이 멍하니 있게 된다. 우울감의 개선에 자주 강조되는 것이 '생각의 고리를 끊어라'인데 "대체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를 외쳤던 사람이 나였다. 의지를 갖고 그것을 제대로 실현해보지 못한 사람이었다. 생각의 연장선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고 돌기도 하고 끊기지도 않는 무한의 길로 뻗어나가곤 한다. 명상은 시작도 못하고 실패하길 여러 번, 차라리 따른 생각으로 끊고자 노력했었던 사람인데 어느 순간 퇴근하고서도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셋째, 판단이 잘 안 된다. 가장 극한으로 간 상태로 일상 속 개인적 취향의 문제에서도 '이게 뭐 중요하냐' 싶은 의욕저하와 함께 결론을 제대로 내리지 못할 때였다. 문제는 일을 할 때다. '흰색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자라.' 글이 내포하고 있는 뜻이 머릿속에 제대로 박히지 않았다. 자동적으로 사고하던 과정 없이 '음... 이게 그 자료구나.' 하고선 습관처럼 일처리를 한다. 아무 일 없는 것 같지만 제대로 된 검토 과정이 없었기 때문에 나중에 누군가 지적하고 나면 '이게 왜 빠졌지? 이걸 왜 빼먹었지?' 나조차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완벽주의자로 일과 관련되어 아쉬운 소리를 들어본 적이 거의 없는 내게 "내가 널 어떻게 해야겠니" 하는 상사의 물음에 자신감과 자존감이 바닥으로 치닫았다. 그것은 강한 압박이었다. 팀장을 주도로 따돌림이 시작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회사에 목매지 말자고 했던 다짐도 무색하게 내 일상은 회사 일만 중심으로 돌아갔다. 열심히라도 하면 번아웃의 엉터리 결과물보다는 낫겠지 싶어 야근을 밥 먹듯 했다. 주 52시간을 넘게 일해서 인사팀에서 퇴근을 미리 찍어놓으라는 연락도 몇 번 받았다. 번아웃은 나아지지 못했고 우울감은 극을 치닫았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선택한 것이었는데 나는 현실을 이기지 못하고 도망쳐왔던 것인가. 나는 이 정도의 삶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인가. 인생의 패배자인가.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것은 언제가 되는 거지.'


결국엔 버티지 못해 또 이직을 선택했다. 죄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도망치는 기분을 쉬이 지울 수가 없었다. 앞서 선택한 이직도 도망이었을까 스스로가 한심해졌다. 내게 직면한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언제나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성공의 경험보다 좌절의 경험이 많은 것이 서러워졌다. 이제는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 누더기가 된 상태였다. 열심히 했던 노력들이 부질없었다.


'내 생에 닥친 모든 것들을 내가 감당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세상이 내 뜻대로 되는 것도 아닌데.'


나를 괴롭히는 것에서 떨어져 나가고 싶었다. 그것은 직장뿐이 아니었다. 평생을 살아온 서울 집에서 벗어나 경기도로 혼자 터전을 옮겼다. 익숙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완벽한 타인 속에서 지내는 경험이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진짜였다. 다만 정말 오랜 세월이 걸린다는 것, 조선시대 삼년상을 왜 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3년쯤 지나니 우울감이 나아지면서 번아웃이 어느새 스르륵 회복되었다.

 



그 이후 번아웃이 한번 더 왔다. 이 때도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다 결국 심리검사에 직무 스트레스가 최고점을 찍었다. 그리고 신체에도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누워있어도 어지러워서 간 병원에서 이석증 진단을 받고 운동중단과 휴식을 처방받았다. 그러나 체력을 아끼고 휴식 늘리려고 운동을 그만두었는데 그렇게 벌어놓은 시간은 더 많은 회사 일을 하는데 쓰일 뿐이었고 고질병의 고통까지 늘어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바라던 직장생활의 개선이 왔을 때에 허리디스크가 터지면서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던 정신력이 원래대로 돌아오지 못하고 탄성력을 잃었다. 스케줄이나 보고서 숫자들에 대한 기억이 'blank'가 되면서 '이번에는 세 번째 단계 초기쯤일까' 자체 진단으로 번아웃을 인지했다.


번아웃도 처음이 아니어서인지 크게 놀라지 않았다. 번아웃을 막지 못해 아쉬웠을 뿐 사실 그럴 법 한 업무 강도와 컨디션이었다. 예민도와 우울감도 따라 심해졌지만 신체의 고통에서 비롯된 감정이 가장 컸기 때문에 몸을 최우선으로 신경을 쓰고 번아웃은 자연스러운 과정인 듯 흘려보내며 여유 있게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조급해한다고 돌아올 것이 아니었고 내 컨디션과 상황이 좋아지면 저절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우울증 환자에게 '커튼 치고 눕지 말라' 하여도 나만의 동굴을 찾는 것은 너무나 본능적이고 당연한 일이다. 그 안에서 현실을 조금 외면하는 일이 뭐가 어때서. 


'일주일 전에 먹은 맛있는 음식, 한 달 전에 했던 어떤 고민 같은 거 기억도 안 나고, 지나간 회사에서 겪었던 문제는 지금의 나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지. 그렇게 언젠가는 모든 것이 다 스쳐 지나간 찰나로 느껴질 때가 올 테지. 설령 내가 도망치는 거라도 내 세상의 중심은 오로지 나니까 나는 그대로라고, 괜찮다고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번아웃을 겪는 이들이 자책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현재의 나를 부정하고 현실에 쌓인 것들을 바라보면서 조급한 마음에 빨리 회복하는 것에 욕심내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현실에 쌓인 일이 내 발치에 쌓여있대도 잠시살짝 모른 체해도 괜찮다. 도망치는 거라고 생각해도 괜찮아. 아마도 그동안 누군가 외면해왔던 걸 나는 똑바로 직면해왔으니 이번 한번은 그럴 수 있다고, 그렇지만 이번에는 그것들을 치워낼 힘이 없다. 큰 추돌사고 전의 브레이크가 있으니 감사하게 생각하자. 조금 쉬면 다음에 힘을 낼 때는 레벨업을 할 수 있을 거다. 오죽 힘들었으면 이렇게 멈춰버렸을까 스스로를 다독여주자. 그동안 고생 많았어.




번아웃을 겪는 지금 받아들이는 나의 자세


현실을 외면하는 것 같아 도망가는 걸까. 아니, 더 아프지 않기 위해 숨 고르기를 하고 있는 거야.

조급함을 버리자. 일 걱정은 너 아니어도 해줄 사람이 있는데, 나는 내가 챙겨야 한다.

생각의 고리가 끊어졌다. 아무 생각도 안 나지만 일 생각도 안 해도 되다니, 멍 때리기가 이런 거구나.

일도, 불안도, 후회도 생각하지 않으니 감정의 평정심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

언젠가 뇌가 조금 여유가 생기는 시간이 오면 그때는 일 말고 좋아하는 걸로 한 스푼 채워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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