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풍 같은 날
이번 추석을 보내면서 마흔 평생에 이렇게 감사하고 평안한 명절이 있었나 싶게 보내놓고도, 직장인에게 다시없을 긴 연휴의 마지막 즈음에는 이렇다 할 기록도 남기지 못할 시간들을 허망하게 떠나보낸 것에 대한 아쉬움이 남았었다.
3주나 거른 재활 때문에 컨디션이 안 좋아진 걸 탓하기도 하고 책이며 글이며 조금 더 생산적인 시간을 보내보자는 다짐을 실천으로 옮기지 못한 스스로의 게으름에 대한 자책도 있었다.
그래서 7일의 추석 연휴보다 연휴가 끝나고 하루 출근하면 바로 돌아오는 주말을 즐겁게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비교적 한산한 사무실에서 여유 있게 근무를 하고 3주나 목 빠지게 기다린 재활을 받고 나니 토요일은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다.
그러니까 오늘은 어디 신나게 소풍을 다녀와서 엄마 앞에서 조잘조잘 얘기하면서 그림일기를 쓰는 초등학생이 된 기분으로 쓰는 글이다.
1. 밤새 창문을 두들기며 잠을 방해하던 비는 아침부터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럭키!
2. 가끔 즐기는 길티 플레져 빅맥세트를 즐겼다. 마지막 양심으로 감튀는 코울슬로로 교체:)
3. 쿠마 겐고가 설계한 오디오 박물관 '오디움'Audeum'을 방문했다.
4. 무지렁이에게 도슨트 투어는 매우 효과적이었다. 시대상과 결부된 이야기들이 흥미로웠다.
5. 음향 체험, 음악을 청음 하며 내가 왜 극장을 좋아했는지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되었다.
공간을 채우며 내 귀로 흘러들어오는 음향에 명상하듯 집중하니 금새 눈물이 차올랐다. 사랑했던 것들을 잊고 지내다 예고 없이 마주한 감동의 눈물이었다. '아, 내가 사랑했던 순간이 이런거였지' 동경하는 이를 만난 감격의 연속이었다.
6. 마지막 라운지에서 느낀 공간적 시각적, 청각적인 경험은 환희였다.
처음엔 시각에 홀려 패브릭을 디자인적으로 텍토닉적으로 구현한 방식에 감탄하고 있었다. 그 후에 음향이 공간에 가득 채워지자 투어를 하면서 몇 번의 청음에 삼켜낸 눈물이 끝내 터지고 말았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아름다운 소리가 빛의 기둥과 함께 하늘에서부터 흘러내리는 것 같은 마치 어떤 종교의 성전에 도달한 기분이었다. 환희라 했지만 극적인 기쁨의 감정보다는 숭고한 경외심에 가까웠다. 눈물을 쏟고나니 마음이 정화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7. 이런 공간이 한국에 있어 한국어로 설명을 듣고 공간과 소리를 감상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8. 오디움에서의 경험이 마치 속세에서 떠나 있던 기분이라 길을 따라 걸었다. 나무에 빨간 나뭇잎들이 가을 단풍이 시작했음을 알려주었다.
9. 걷다 보니 다음 목적지가 너무 멀어 거의 1년 만에 따릉이 자전거 타기에 도전했다.
10. 보잘것없는 자전거 실력이지만 사람이 없어 신나게 바람을 즐겼다. 단, 10분이 한계였다.
11. 오래전 북마크 해둔 베이커리에 드디어 갔다. 운이 좋게 갓 구운 크루아상을 받았다. 바삭 쫀득 식감과 버터의 풍미에 금세 사라져 버렸지만, 먹는 순간보다 행복감이 오래 지속되었다. 또 가야지.
12.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동안 오늘은 기필코 일기를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기분 좋은 날 쓰는 게 미래의 내게도 힘이 되어줄 테니.
오늘은 현재를 즐긴 하루였다. 많은 즐거운 일들이 아주 주요한 역할을 해줬지만 그 순간을 오롯이 즐긴 나에게 제일 칭찬해주고 싶다. 고대하고 기다렸지만 쉽지 않은 마음 아니었던가. 실천한 나에게 감사하며, 충분히 즐거워한 내게 잘했다고 말해줘야지.
앞으로도 이런 시간을 많이 쌓아보자.
눈물 퐁퐁 솟았던
<Moon River>
Moon river, wider than a mile
달빛이 흐르는 넓은 강아
I’m crossing you in style some day
난 언젠가 널 멋지게 건너겠어
Oh, dream maker, you heart breaker
오, 내 사랑을 부셔버린 당신
Wherever you’re goin', I'm goin' your way
당신이 어딜 가던지 난 따라가겠어
Two drifters, off to see the world
세상밖의 두 포류자
There's such a lot of world to see
세상 많은것을 보았지
We’re after the same rainbow’s end,
우린 무지게 양쪽 끝에있어
Waitin around the bend my huckleberry friend,
내 허클베리 친구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어
Moon river, and me
달빛이 흐르는 강, 그리고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