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치 엄마와 지도 없는 아이
길치 엄마인 나는 지도도 설명서도 없는 아이를 만났다.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어려워졌고
나는 방향을 잃은 채 아이의 손을 붙잡고 서 있었다.
호수는 12월생이다. 그것도 26일.
전날인 25일, 크리스마스에는
함양 시댁에 내려가 어머님을 뵈었다.
어머님은 여기저기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컸는지
만삭인 나를 데리고 하루 종일 걷고 또 걸었다.
산책인지 행군인지 모를 일정이었다.
나는 네네병에 걸린 사람처럼 웃었고
철부지 남편은 이유도 모른 채 함께 웃었다.
밑이 빠지는 통증은 무감각해질 만큼 쌓였고
종아리는 퉁퉁 부어 손가락이 푹푹 들어갔다.
송곳이 달린 운동화를 신은 것처럼 발바닥이 아팠다.
그렇게 만신창이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의 행군을 이 아이는 다르게 받아들였을까.
새벽 내내 싸르르한 통증이 이어졌다.
가볍다고 여겼고, 참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만삭에 많이 걸으면 빨리 열린다는
초록창의 답변을 믿기로 했다.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리는 동안
통증은 점점 묵직해졌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찾아왔다.
기록을 해봤지만 간격은 들쭉날쭉했다.
역시 가진통이겠지, 생각하던 순간
화장실에서 많은 양의 피를 봤다.
그제야 이건 진짜라는 걸 알았다.
“나, 지금 병원 가야 해.”
동생 차에 올라탔고
차가 움직이자 통증은 더 분명해졌다.
병원에 도착했을 땐
걸음을 옮기기조차 버거웠다.
접수대 앞에서도 통증은 쉬지 않고 밀려왔고
곧바로 분만실로 올라갔다.
내진을 하던 간호사는 말했다.
“다 열렸네요.”
의사 선생님은 웃으며 덧붙였다.
“안 아팠어? 잘 참았네.”
그 말 이후로 진통은 다른 얼굴이 됐다.
조인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했다.
수박 덩어리 같은 무언가가
몸 안에 억지로 끼어 있었고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당장 배를 갈라 꺼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런데도 옆에서는
“호흡하실게요”라는 말이 들려왔다.
이 저세상 불편함을 견디기엔
나는 너무 하찮은 인간이었다.
“분만장으로 이동할게요.”
침대가 움직였고
나는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고 생각했다.
분만대에 누워 문득 떠오른 건
엄마가 소리를 지르면
아기가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어디선가 읽은 문장이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병원에 도착한 지 한 시간 남짓,
그 무언가의 덩어리가 빠져나갔고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예정일은 1월 3일이었다.
하지만 뱃속에서부터 성미가 급했던 이 아이는
아침부터 엄마를 재촉하더니
끝내 세상으로 먼저 나와버렸다.
손가락 열 개, 발가락 열 개.
울음소리는 우렁찼고
고추도 잘생긴 남자아이였다.
무던한 아이였다.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는
순하디 순한, 키우기 쉬운 아이.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눈동자를 굴리며 반응했다.
등 센서가 있으면 어떠랴.
밤새 안고 있어도 아깝지 않았다.
수유텀에 맞춰 자고 깨는 게 아니라
그냥 계속 깨어 있었다.
수유하고, 재우고, 젖병을 소독하고
밀린 빨래를 했다.
그러다 보면 다시 수유, 다시 기저귀였다.
고운 엉덩이 물러질까
색이 변한 기저귀를 못 보는 병에 걸린 사람처럼
며칠을 날로 새웠다.
산후조리는 잊은 지 오래였다.
다시는 오지 않을 순간들을
그저 눈에 담고 있었다.
나는 세상 무지한, 해맑은 엄마였다.
발달에는 관심이 없었고
좋은 음식과 좋은 옷이면
아이도 잘 자랄 거라 믿었다.
형편은 넉넉하지 않았지만
마트에 가면 키즈&베이비 코너로 향했다.
가장 좋은 것, 가장 비싼 것을 카트에 담고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아동복 코너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우리 호수 입으면 얼마나 예쁠까’
그 생각에 손에는 늘 옷이 들려 있었다.
발달 지침은 내 관심 밖이었다.
지금쯤 배밀이를 해야 한다거나
이제는 잡고 일어서야 한다는 말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되는 거라 믿었다.
돌이 지나도 걷지 못하던 아이는
어느새 걸었고
나는 역시 시간의 문제라 생각했다.
말을 거의 하지 않아도
12월생이라 늦나 보다 하며 두 돌을 맞았다.
어린이집에 다니는
호수는 울음도 짧고 짜증도 짧은
그저 웃음 많은 해보 김호수 선생이었다.
네 살이 되어도
호수의 말은 단어에 머물렀다.
그제야 처음으로 고개가 기울었다.
등원길에서 만나는 또래 아이들은
노래를 외우고 엄마와 대화를 나누는데
호수의 입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원장님께 물으면
“별문제 없다”는 말이 돌아왔다.
48개월 검진 문진표를 작성하며
처음으로 오래 멈춰 섰다.
할 수 없는 항목이 너무 많았다.
병원에서 들은 말은
“자폐 가능성이 있습니다”였다.
부리나케 검색을 했다.
맞는 것도, 맞지 않는 것도 있었다.
호명 반응은 좋고
상호작용도 나쁘지 않은데
관심은 유난히 좁았다.
어린이집에 전화를 걸었다.
“호수가요? 아니에요.”
“그래도 문진표에…”
“늦더라도 결국 다 하게 돼요.”
전화를 끊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그렇지, 우리 아이가 설마.
앞으로는 조금 더 신경 써야지,
알량한 다짐만 남겼다.
남자아이는 원래 좀 늦다더라.
12월생이면 더 늦을 수 있다더라.
그 말에 오래 머물며
나는 여전히, 그렇게 예쁘게만 아이를 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