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상인 Nov 27. 2021

내 말이 맞다고 인정해.

 "돈 300만 원만 투자하면 정말 괜찮은 사업을 시작할 수 있어."

2014년, 아직 쌀쌀함이 채 찾아오지 않은 무더운 입추에 와이프와 집 앞 카페를 찾았다. 곧 시작하게 될 아동극 사업의 브리핑을 위해서였다. 결혼을 하게 되니 수중에 이래저래 몇 푼의 돈이 주머니에 있었다. 물론 내 주머니가 아니라 와이프 명의의 통장에 말이다. 와이프에게 허락을 구하고 돈을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내가 그동안 학교와 알바를 다니며 알게 된 기술적 지식들과 소정의 투자 금액만 있으면 아동극을 시작할 수 있었다.

 내 생각은 너무나도 단순하고 간단했다. 우선 배우를 모은다. 왜냐하면 모든 게 다 갖추어져도 배우가 없으면 공연을 올릴 수 없기 때문이다. 배우들에게 페이를 주고 다음엔 저작권이 없는 노래와 동화를 각색하면 되다고 정말 쉽게 생각했다. 와이프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내게 말했다. "글쎄...?"  와이프는 매우 조심스러운 성격이다. "오빠, 몇억씩 쏟아부은 사업도 될까 말까 한데 300만 원으로 무슨 사업을 해?" 지금 돌이켜보면 와이프의 말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투자금액이 많다고 해서 성공하는 것도 아니며 반대로 투자금액이 없다고 해서 실패하는 것도 아니다. "자기야. 생각을 해봐. 내가 수십억을 들여서 망했으면 좋겠어? 300 가지고 망했으면 좋겠어? 어차피 잃어봐야 300이야." 내가 격양된 어조로 와이프에게 호소했다. "오빠, 오빠 월급이 200도 안 돼. 우리한테 300이면 몇 달 치 생활비야. 지금 우리에겐 엄청 큰돈이라고." 할 말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밀어붙였다. 아니, 도저히 200도 안 되는 돈을 벌어가면서 남들에게 굽신 거리는 삶을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다. 그렇게 시작한 아동극 사업은 하나둘 돈을 쓰다 보니 내가 가진 돈을 거진 다 썼다. 이윽고 '사업은 이렇게 하는 거구나...'라는 깨달음을 얻기 시작할 때쯤, 메르스가 나타났다. 불과 아동극을 시작한 지 3개월 차의 일이다.

 항상 나는 이런 식이다. 우선 내가 원하는 바를 강력하게 주장한다. 반대하는 사람이 있으면 내 나름의 온갖 논리를 들이밀어 내 의사를 관철시키고야 마는 성격이다. 문제는 그렇게 초반에 관철시키는 나의 논리력을 끝까지 밀고 가야 하는데, 막상 현실에 부딪히면 좌절하고 마는 게 내 성격이다. 그래서 언제나 상상하고 부딪히고 현실에 무너져 이불속으로 숨는 생활을 몇 번씩이나 반복했다. 그런데 이제 와 생각해 보니 현실에 무녀 졌을 때가 바로 '성공'의 도약점이다. 근데 나는 그 도약점 앞에서 항상 좌절했기에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다.

 요시카와 에이지가 각색하여 쓴 소설 삼국지에는 유관장 삼 형제가 처음 만나는 이야기를 재미나게 풀었다. 일찍이 유비와 장비는 안면이 있었다. 나중에 헤어져 지내다 우연히 의병 모집 방을 통해 만나게 된다. 장비는 유비와 이야기를 나누고 그날 밤에 자신과 친분이 있는 관우에게 달려간다. "관형, 내가 괜찮은 사람을 알고 있소. 유비라는 사람인데, 지금 만나러 갑시다." 관우는 유비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음에도 어찌 사람을 쉬이 판단하냐며 장비를 다그친다. 관우를 형처럼 모시는 장비는 큰마음의 상처를 입고 '내가 직접 데려와서 보여주리라.'라고 다짐한다. 그렇게 유비를 찾아가 '유공 나와 함께 관우 형을 만나러 갑시다.'라고 하니 유비의 답은 "글쎄"였다. 요시카와 에이지는 이에 대해 ' 믿지 않는 사람에게 굳이 자신을 믿어 달라고 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는 눈치다.'라는 문장으로 유비의 속마음을 표현한다.

 내 주장이 틀림이 없다며 사업을 하고야 말겠다고 강요하는 내 모습은 마치 장비와 같았다. 하지만 유비의 생각처럼 믿지 않는 사람에게 굳이 나를 믿어 달라고 조르는 게 정말 옳은 일일까? 그저 내가 믿으면 그만이지 왜 나의 믿음을 남에게 강요해야 할까? 어린 시절에 내가 제일 싫어하던 일이 바로 '전도'였다. 나는 불자인데, 왜 자꾸 나에게 하나님을 믿으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린 마음에 내가 '그럼 어르신께서 부처님을 믿어보시는 건 어떠세요?'라고 하니 역전도를 해보았다. 그랬더니 전도사님께서 나에게 노발대발하며 그는 신이 아니라 동상이라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나에겐 자기 종교를 믿으라고 할 권리는 있으면서 자신은 다른 종교를 믿으라는 권유를 받지 않을 권리라도 있다는 걸까? 어린 마음에 큰 상처로 남아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후 조금 더 자란 사춘기 때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 오히려 내가 논리적으로 두들겨 패고 다녔다. 어른이 된 지금은 종교를 불문하고 좋은 말씀이면 다 귀담아듣는다. 또한 그렇게 전도하시는 분들의 '따뜻한 마음'이 더 소중하다는 점을 이제 와서는 새삼 느낀다. 물론 전도라는 개념은 하나님을 믿는 분들에게 국한되어 있지 않다. '도'를 아냐고 묻는 사람부터 '기운이 좋으신 거 아시냐는 분'까지 매우 다양하다. 내로남불.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다. 내가 남들에게 내 주장을 강력하게 어필하면 로맨스였다. 와이프에게 그랬듯이 말이다. 반대로 남들이 나에게 자기주장을 하는 일에 욱하던 모습은 불륜이다. 내가 '내 주장만 강요하기' 혹은 '답정너'를 그렇게 싫어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

 삼국지의 내용 중 적벽대전이나 관도대전, 이릉대전과 같은 커다란 사건에는 자연스럽게 큰 지혜가 담겨 있다. 하지만 관우를 설득시키기 위해 유비를 찾아간 장비, 두 사람의 가벼운 대화 속에도 나에게 큰 깨달음을 준다. 나는 이런 점이 삼국지의 매력이라 생각한다. 

 배우들 사이에선 유명하게 떠도는 명언이 하나 있다. '작은 배역은 있어도 작은 배우는 없다.' 나는 이 명언을 삼국지에도 적용시켜 보고 싶다. '삼국지에 작은 장면은 있어도 작은 깨달음은 없다'


작가의 이전글 정보의 홍수 속에서 빛나는 정보를 찾아내는 방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