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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상인 Dec 24. 2021

구설수를 이겨내는 방법

살다 보면 사람을 안주 삼아 이야기할 때가 종종 있다. 또 그런 남 이야기가 재미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남 이야기에서 그치지 않고 사람을 헐뜯고 음해하는 사람도 많다. 이런 음해와 구설수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 오늘은 스피키오의 말년의 이야기를 통해 반면교사로 배워보고자 한다.


언제나 적은 내부에 있었다. 스피키오는 로마를 지중해 패권국으로 만든 장본인임에는 틀림이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도 언제나 좋은 시절만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산을 정복하러 가는 사람은 없다. 정상에 올라갔으면 다시 내려오기 마련이다. 집이 정상이 아니고서야. 다만 이 정상에서 완만하게 내려오는가? 아면 굴러 떨어지느냐? 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시리아 전쟁이 끝나고 스피키오는 재판에 회부되었다. 정확하게는 스피키오의 형이 당했다. 이유는 시리아 전쟁의 강화 내용 중 '500달렌트(고대 화폐단위)'를 즉시 지급하라는 내용이 있었다. 재판은 이 500달렌트의 사용처가 불분명하다는 이유였다. 당시 로마는 공화정이었다. 제 아무리 스피키오가 장군으로서도 훌륭하고 정치가로서도 훌륭하다 한들 독재자처럼 계속 집정관을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었다. 시리아 전쟁 때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바지사장으로 스피키오의 형이 집정관이 되어 시리아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기에 재판은 스피키오의 형이 받았지만, 결국 이건 스피키오에게 던져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스피키오의 형이 500달렌트의 사용처 장부를 하나하나 읽어 나가려 할 때, 스피키오가 단상에 뛰어올라 장부를 갈기갈기 찢어버리며 '도대체 로마는 나에 대한 예우도 없는 것인가?'라며 소리를 질렀다. 스피키오가 로마에 남긴 업적이 500달 렌트 따위와 비교될 수 없는 일이긴 하니 말이다. 뭐 어쨌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피키오를 헐뜯는 반스피키오세력에 의해 이 작은 '500달렌트'로 스피키오는 원로원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얼마나 화가 났으면, 본인 스스로 자진해서 하야했다. 게다가 로마를 떠나 자신의 별장에서 죽을 때까지 살았다. 죽은 뒤에도 가족묘지에 묻히길 거부했다. 가족묘지가 로마 땅에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정말 재밌는 건, 같은 해에 한니발도 죽었다는 이야기다. 여기저기 망명생활을 전전하던 끝에 로마 병사가 한니발을 로마에 팔아넘기려는 수작을 간파하고 독음 자살했다. 불세출의 거장 두 사람이 한 시대에 태어난 것도 대단한 일인데, 두 사람이 같은 해에 죽었으며 그들의 말로가 그다지 순탄치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왠지 씁쓸해진다.


사실 이런 음해는 비단 고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현재 대한민국. 아니, 지금 대선에서도 우리는 이런 음해를 목격할 수 있다. 대통령이란 직책은 '국가 행정을 다스리는 자리'인데, 별 의미 없는 터럭까지 끌고 나와 음해하기 일수다. 정말 가관이다. 이는 우리의 국민의 풍조를 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앞서 말한 대로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국가 행정을 다스리는 자리'이다. 그럼 대선 주자의 행정력 혹은 공약을 보고 투표를 해야 하는데, 그런 것보다 그 사람의 재산, 과거, 인성, 품성 등을 고려하여 뽑으려는 풍조가 깊다. 때문에 대선 때만 되면, 저 사람은 이러저러해서 안돼라며 대통령의 능력과는 전혀 상관없는 별개의 문제로 투표를 마다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정말 가슴 아픈 일이다. 누가누가 착하게 살았는가?를 뽐내는 잔치가 아니라. 5천만 국민을 이끌 정치자로서 한 사람을 보고 투표하길 진심으로 바라는 바이다.

vincent van gogh - Almond Blossoms

역사나 정치는 집어치우고 이제 개인으로 돌아와 보자. 첫 때로는 나의 이득을 위해 누군가를 음해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심리학에서 우월 콤플렉스라는 개념이 있다. 나의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 남들을 무시하고 가르치려는 행동을 도드라지게 보이는 증상을 일컫는 말이다. 즉, 남을 음해하면 할수록 내가 살아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처음엔 웃으며 넘길 만큼 사람을 음해하지만, 나중에는 정말 듣기 거북한 말들로 나를 음해하기도 한다. 남이 나에게 이러면, 그 사람과 안 만나면 그만이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에게 그렇게 하고 있진 않나? 꼭 한 번은 돌아보아야 할 문제이다. 둘 째로는 사업을 하며, 모임을 이끌며 구설수에 올랐을 때, 스피키오처럼 맞불작전으로 나가면 오히려 더욱 문제가 된다. 어찌 보면 스피키오는 '그까짓 500달렌트 때문에 나를 음해하는 거요!'라고 소리쳤던 것이다. 이는 일상에서 보면 부부싸움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자기 왜 어제 그렇게 했어!' '내가 뭘! 나는 그 정도도 못하냐?'라고 대꾸해버리면 당장에 큰 싸움으로 번지며, 지난 과거사들이 줄줄줄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만약 여기서, '내가 서운하게 했다면 미안해.'라는 식으로 좋게 넘어간다면, 상대도 '아니야. 하지만 앞으론 조심해 줘'정도로 일단락이 되니 말이다. 회사나 모임을 이끄는 경영자도 마찬가지다. '우리 리더는 이상한 사람이야'라고 구설수에 오르게 된다면, 거기에 휘둘리거나 그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애쓰지 말고 묵묵히 리더가 해야 할 일을 해나간다면, 자연스레 구설수가 해소되지 않을까?


혹시 지금 구설수에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너무 구설수를 해소하기 위해 고민하지 마시고 차분히 내 할 일을 하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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