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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상인 Jan 12. 2022

고통과 시련, 절망 속에 있을 때.

한국 현대사를 배움에 있어서 우리에게 큰 의미로 다가오는 단어가 있다. 바로 '쿠데타'이다. 요즘 교과서는 어떻게 가르치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배우던 시기에는 '군사혁명'이라고 배웠던 기억이 난다. 물론 이 명칭에 대해서 왈가왈부 논란이 많이 있었다. 왜냐하면,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을 칭송하는 관점과 반대의 입장의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관점에 따라 그 사람의 최초의 행위가 쿠데타냐? 혹은 군사 혁명이냐?로 갈리게 된다. 나는 이 부분에 있어서 어느 쪽이냐? 묻는다면 어느 쪽도 아니며, 어떻게 불리든 상관없다. 모든 인간에게는 장점이 있다면 단점도 있기 마련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라고 안 그랬을까? 그 사람의 업적도 장이 있으면 단이 있는 법이다. 그저 나는 그 양면을 모두 바라보기 때문에, 어느 쪽으로 불려도 상관이 없다는 이야기다.  물론 가장 좋은 건 두 단어를 합친 새로운 신조어쯤 되려나? 싶다. 가령 쿠테혁명이라던지 쿠사혁데라든지. 뭐 상관없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도 군사로 국가를 장악하는 일이 있었고 또 세계적으로도 많은 이들이 군의 힘을 빌어 정치를 휘어잡은 사례는 생각보다 많다. 로마도 마찬가지였다. 마리우스의 군사 개편 이전까지의 로마군은 말 그래도 로마를 위한 군이었다. 하지만 마리우스가 지원병 제도를 실시함으로써, 사병을 거머쥘 수 있게 되었다. 즉, 나라를 위한 군대가 아니라 개인을 위한 군대로 쪼개졌다는 의미다. 이런 상황 속에서 동맹시 전쟁이 일어났고 이어 미트라타데스 전쟁이 발발했다. 미트라타데스는 아시아에 있는 나라 폰투스의 왕 이름이다. 이 미트라타데스 왕이 소아시아에 있는 로마의 속주들을 공격하면서 시작되게 되었다. 이때, 이 전쟁에 집정관으로 나가기 위해 두 사람이 노리고 있었다. 바로 마리우스와 술라였다. 마리우스는 지난 동맹시 전쟁으로 인해 인기가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우유부단하게 중재를 잘 못했기에 원래 자신을 지지하던 평민파들도 그에게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기를 만회하기 위해 마리우스는 이 전쟁에 나가고자 했다. 술라는 이 전쟁에 나가 당당히 중앙 정치 무대에 올라서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다. 누구를 보내느냐?로 원로원이 갈등하고 있을 때, 호민관 술피키우스가 자신의 법안을 채택시키기 위해 마리우스와 연대를 맺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군인의 사병화가 진행되어 있는 상황이다. 이 말은 로마의 평민인 군인의 표가 그 군인의 상관의 표나 다름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술피키우스는 자신의 법안과 미트라타데스 전쟁을 마리우스에게 맡기자고 제출했고 결국 가결되었다. 술라는 이에 반대했다가 마리우스와 술피키우스 지지자들로부터 위협을 받게 되었다. 성난 지지자들은 술라를 죽이러 갔지만 술라는 이때 빠르게 몸을 피신했다. 심지어 이때 피신한 집이 마리우스네 집이었다고 한다. 참 술라도 뻔뻔하다. 마리우스는 왜 술라를 받아주었는가? 생각해보면, 자기가 아량을 베풀면 알아서 꼬리를 내리겠지 싶었다나? 어쨌든 피신한 술라는 자신의 군을 로마로 진격시키는 꾀를 부렸다. 로마는 군사로 장악되었고 결국 술라는 군사력을 대동하여 로마를 장악하기에 이른다.


Lucius Cornelius Sulla Felix

 이를 통해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은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나중에 나올 이야기지만 술라의 모든 정책은 사실상 수포로 돌아간다.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군대까지 동원하는 무시무시한 일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쿠데타처럼 배수의 진을 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할 때가 종종 있다. 그런데 지나고 보면 그때 내가 했던 중대한 결정이 훗날엔 큰 의미가 없을 때도 있다. 그땐 그리도 죽을 것같이 큰 아픔이었는데도 훗날 지나고 보면 아무렇지도 않은 일들. 참 인생은 아이러니하다.


그렇다고 우리의 아픈 역사를 모두 잊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첫사랑의 아픈 상처가 10년이고 20년이 지난 지금에야 무슨 아픔이겠냐만은. 그때의 그 상처가 나를 더욱 성장시켜주었음에는 이견이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우린 첫사랑을 가슴에 묻고 살지 않는가? 물론 나의 첫사랑이자 끝사랑은 와이프이기 때문에 가슴에도 묻고 인생에도 묻고 와이프 앞에서 고개도 숙이고 하지만 말이다.


어찌 보면 한 나라의 역사 혹은 한 사람의 위인들을 보면 참 우리 내와 별반 다를 게 없는 인간이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도 지나간 일들을 쓴 위인전들이 대게 그러하듯, 결국은 그런 쓰디쓴 인생을 딛고 시련을 이겨냈다고 나오지만. 우리네 인생은 아직 끝나지 않은 영화처럼 고통과 시련, 좌절, 행복, 즐거움 등이 다양하게 뒤섞여 있다. 뭐 내가 죽어 누군가 내 인생을 두고 위인전을 써줄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안 쓰여도 상관없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아직 끝나지 않은 내 인생이라는 영화가 비극이기보다 희극으로 마침표를 찍는 연속극이었으면 좋겠다.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니 말이다.


혹시 지금 고통과 시련, 좌절, 끊임없는 부정적인 생각과 씨름하고 있다면, 그저 내 인생이라는 영화를 보듯 멀리서 내 인생을 바라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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