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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상인 Jan 10. 2022

우유부단함으로 흑역사를 남긴 사람.

그렇게 평민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끈 마리우스는 평민들에게 큰 인기를 구가했다. 하지만 앞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마리우스는 정치에는 큰 관심이 없었던 거 같다. 아니 더욱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권력은 좋아하지만 권력의 최상위에 앉아 있는 사람이 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당시 로마는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안으로 인해 평민파와 귀족파로 나뉘었다. -이런 명칭은 후대의 역사가들이 만들었다.- 마리우스는 평민파에게 큰 지지를 얻었음에도 평민파의 편도 그렇다고 귀족파의 편도 아니었다. 그저 지금 그 자리에 만족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우리나라의 역사처럼 탕평책을 쓰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들의 싸움은 수면 아래에서 곪아 터져 가고만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동맹시 전쟁이 발발했다. 로마는 다른 국가와 동맹을 맺었다. 그중 이탈리아 반도 내의 동맹은 조금 더 특별했다. 전시에는 로마군 징병이 먼저이지만, 동맹시에서도 군사를 징병한다. 문제는 로마 시민권에 있었다. 로마인만이 로마 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다. 마리우스가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즉, 지원병을 받는 건 로마 시민권을 가진 로마인뿐이었다. 반대로 동맹시는 개편을 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들에게 자주권을 주었으니, 굳이 군사 개편을 그들에게까지 적용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동맹시에서 축출된 병사 입장에서는 로마를 위해 싸우고 나서도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게 없으니 얼마나 부당하다 느꼈을까? 이때 나타난 게 바로 호민관 드루수스다 드루수스는 동맹시인들에게 로마의 시민권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귀족파는 노발대발하기 시작했다. 결국 드루수스의 개혁은 수포로 돌아갔고 드루수스도 비명에 횡사했다. 이러한 연고로 인해 동맹시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서 동맹시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겨우겨우 동맹시 반란을 진압하긴 했지만. 사실상 이는 로마의 내전이나 다름이 없었다. 결국에는 로마의 시민권이 확대되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그 대가는 너무도 컸다. 하이켈하임은 이때 피해가 한니발 전쟁의 피해와 맞먹는 수준이라고 이야기했을 정도니, 그 피해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중재를 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철학사에서 칸트를 위대한 철학자 중 한 명으로 꼽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중재의 미를 백분 발휘했기 때문이다. 칸트 이전의 철학은 쌍두마차가 서로 다른 길로 달리고 있었다. 영국의 경험론과 대륙의 합리론으로. 영국의 경험론을 간략하게 설명하면, 내일 해가 뜰 거라는 걸 어떻게 아는가?라는 질문에 어제도 떴고 그제도 떴고 매일 아침 해가 뜨는 걸 보았으니, 내일도 해가 뜰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다. 내가 경험했기 때문에 안다는 의미에서 경험론이다. 반대로 합리론은 해가 뜬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에 어제도 떴고 오늘도 떴고 내일도 뜬다는 이야기다. 경험론은 귀납적 추론 방식, 합리론은 연역적 추론 방식이라고 한다. 어찌 보면 답이 나오지 않는 이 두 가지를 잘 엮어서 자신만의 새로운 철학을 내세운 게 칸트다. 그래서 칸트의 철학이 어렵다. 애초에 칸트는 논제 자체를 뒤집어 버렸다. 해가 매일 뜨는지 안 뜨는지는 인간의 이성으로서는 알 수 없다.라고 생각을 전환시켰다. 즉, 칸트 이전의 논쟁은 모두 '인간은 무엇이든 다 알 수 있다'라는 전제하에 진행된다. 하지만 이 전제 자체를 없애 버린 게 칸트다. 그러니 이해하기 난해한 것도 사실이다.


이렇게 중재한다는 것 혹은 두 의견을 포용하여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 낸다는 건 쉬운 일은 아니다. 마리우스가 중재하고자 했던 건 칸트처럼 새로운 의견을 만들어 내는 게 아닌, 그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용도로 중재를 했기 때문에 이 문제가 더 곪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이든 생각을 보류한다는 것도 하나의 선택지이지만, 중대한 결정 앞에서는 결단을 내려야 하지 않을까?


돌이켜 보면 내 인생 속에서도 우유부단하게 이도 저도 하지 못하고 시간만 버린 시간들이 꽤나 많다. 그렇게 시간을 버리면서 문제가 곪아 터지기 전에 단칼에 조금은 불합리하더라도 결정을 하고 단행하는 편이 새로운 방안을 모색해 내기보다는 훨씬 수월하지 않을까?


물론 칸트처럼 자신의 인생을 걸고 매진할 연구에서는 시간이 필요한 게 당연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우리네 인생은 연구자처럼 평생 연구만 하다가 지나가는 건 또 아니니. 결국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결단을 내리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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