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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디오스 Dec 24. 2023

세상에서 유일한 추억 이야기 (feat. 변진섭)

시내버스 기사님. 감사합니다!

철없지만 좋았던 대학 시절에 있었던 추억 얘기다. 감히 말하건대 이 추억은 대한민국에서, 아니 전 세계에서 시대를 통틀어서 나와 우리 친구들만이 가진 유일한 추억이 아닐까  싶다. (댓글로 반박 가능)

대학교 1, 2학년 때 유행했던 가수들 중에 나와 친구들은 이문세와 변진섭을 좋아했다. 그땐 요즘 아이들은 TV에서나 봤을 법한 테이프란 걸 사서 카세트 플레이어에 넣어서 들었다.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너무 많이 들어서 테이프가 늘어난 추억쯤은 우리 나이 대엔 흔할 것이다. 지금 얘기하려는 건 그것보다 증상이 좀 더 심한 추억 얘기다.

그 시절에는 mp3가 없어서 집에서나 친구 자취방에서는 실컷 들을 수 있었는데 밖에서는 들을 수가 없었다. 시험기간 끝난 어느 날, 친구들과 근교로 놀라간 버스 안에서의 일이다. 마음이 들뜨서인지 나와 친구들은 변진섭 노래가 너무, 아니 미치도록 듣고 싶었다.


들판을 달리는 버스 안에서,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버스 안에서, 손님도 그리 많지 않은 버스 안에서 감미로운 변진섭 노래를 한 번만 들으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가방 안에는 항상 이문세와 변진섭의 테이프가 있었다. 그래야 친구집이든 어디든 카세트만 있으면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시내버스에도 그런 장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 버스에는 테이프를 넣어 노래를 듣는 장비가 있었다. 아저씨들이 트로트를 자주 틀곤 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내가 버스 기사 아저씨께 부탁해 보기로 했다. 버스 뒷자리에서 흔들거리는 버스 통로를 가로질러 기사 아저씨께로 갔다. 큰소리를 치고 운전석까지 갔지만 차마 큰 소리로는 얘기를 못했다. 그래서인지 아저씨가 몇 번이나 되물었다.

뭐라고?  볼륨을 낮춰 달라고?  학생, 안 들려. 테이프를 뭐?

그도 그럴 것이지 아저씨도 관광버스가 아닌 시내버스에서는 그런 부탁을 처음 받아 보셨을 것이다.

기사 아저씨 외에는 다른 손님들은 못 듣게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저씨... 저희들이요, 변진섭 노래가 너무 듣고 싶은데요. 테이프 있는데... 좀 틀어주실 수 있으세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지금 생각하니 어이가 없다. 버스 안에 다른 손님도 있었는데 말이다.

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아저씨는 부탁을 들어주셨다. 그때 아저씨가 피식 웃었는지 어이없어했는지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꼭 테이프는 첫 곡부터 들어야 한다는 철칙을 가지고 있었지만 차마 아저씨께 테이프를 감아서 첫 곡부터 틀어 달라는 부탁까지는 못했다.

변진섭의 히트곡은 정말 많다. 홀로 된다는 것, 새들처럼, 너무 늦었잖아요, 숙녀에게, 너에게로 또다시, 희망사항, 어떤 이별...

돌비시스템 부럽지 않았다. 아니, 버스 안 음향 시스템은 방송국 못지않았다(고 생각한다). 그 큰 버스를 꽉 채우며 울려 퍼지는 변진섭의 노래를 들으며 맨 뒷자리에서 친구들과 목소리 낮춰 따라 부르던 시절, 그 철없던 시절이 생각난다.

피식 웃음이 난다. 어, 이상하다.

찔금, 눈물도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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