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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결심 이후 난 불안해졌다

by idle

은퇴 날짜를 정한 이후부터 난 불안해졌다. 수시로 은퇴자금을 계산한 스프레드 시트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예상 저축 금액을 조금씩 바꿔본다. 한 달에 이 만큼만 더 모으면, 여유가 좀 생길까? 1년이라도 더 일하면 괜찮지 않을까? 하지만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하늘에서 돈이 뚝 떨어지지는 않는다. 반면 남편은 태평했다. 시간이 너무 안 간다고 했다.

“난 원래 마흔에 은퇴하는 게 목표였잖아. 난 내 계획보다 훨씬 오래 회사 다니고 있는 거야.” 라면서 의기양양했다.


우린 맞벌이고 아이도 없다. 둘 다 여행 다니는 것 외에는 크게 욕심이 없어서 생각보다 한 달에 모이는 돈이 많았다. 돈이 모일 수록 어떻게 불려 나갈지도 걱정이었다. 곧 은퇴할 텐데 한 푼이라도 더 불려야 했다. 둘 다 금융맹이라서 재테크 강의부터 들었다. 기본적인 개념을 아는데 도움은 되었지만 소심한 우리는 적극적으로 투자할 자신이 없었다. 재테크 강사는 돈을 모으기 위해서는 우선 괜찮은 지역에 아파트부터 사라고 했다. 투자할 자신은 없으니 우선 기본부터 하기로 했다. 적어도 떨어지지는 않을 만한 위치의 역세권 아파트를 검색해보기 시작했다. 예산은 은퇴하기 전까지 우리가 모을 수 있는 최대 금액으로 했다. 몇 군데 돌아본 후 지금의 집을 매매하기로 결정했다. 집값이 꿈틀 하기 시작할 때여서 어려움은 있었지만 무사히 매매에 성공했다. 은퇴 후에는 집을 팔아서 자금을 마련할 계획이었다.


다행히 집 값은 조금씩 올랐다. 가격이 오를 때마다 남편이 말했다.

“집값이 올랐으니 그만큼 빨리 그만둬도 되는 거 아니야?”

“빚은 다 갚아야지. 그때까지만 참아.”

우린 은퇴 전 모을 수 있는 최대치를 대출받았다. 어쩔 수 없이 그때까지는 일해야 했다. 빚도 갚아야 하고, 집을 팔기 전까지 생활할 자금 마련도 필요했다. 매달 계획에 맞게 대출을 갚고 저축을 했다. 어느 날 남편이 우울해하며 말했다.

“혼자 살 때 보다 더 가난하게 사는 것 같아.”

“대신 자산이 늘었잖아.”

“내 돈은 없는걸. 소용없어. 이 지긋지긋한 가난.”


남편은 결혼 전까지 월급을 통장 하나로 관리했다. 적금, 펀드 등으로 돈을 모으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고, 통장에 돈이 모이면 뭘 살 지부터 고민했다 했다. 그러던 그가 생활비와 대출로 월급 대부분을 나에게 보내고 있으니 텅 빈 통장을 보며 우울해졌던 것이다.

“그럼 각자 비자금을 좀 가질까?”

“좋다!!”

그렇게 모은 돈의 일부를 남편과 나눠가졌다. 남편과 나는 그 돈으로 주식을 시작했다.

“얼마나 벌었어?”

“알려고 하지 마. 이 돈은 온전히 나를 위해 쓸 거야. 흐흐.”

“그냥 궁금해서 그러지.”

난 주식으로 돈을 벌 때마다 자랑했지만, 남편은 철저히 비밀로 했다. 서로가 아는 그 비밀에 남편은 숨통이 조금 트이는 것 같아 보였다. 주식 투자를 시작한 것은 우리에게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다. 아침마다 경제 기사를 챙겨 보았다. 수시로 주식 차트를 들여다보며 흐름을 공부했다. 금융맹이던 우리가 부동산 외에도 돈 버는 다양한 방법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난 그때쯤 회사에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일은 재밌었지만 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주말을 제외하고는 남편과 제대로 대화할 수 있는 시간도 없었다. 쉬지를 못하니 몸이 아파왔다. 스트레스성 장염에 걸려 새벽에 응급실에 가야 할 만큼 아팠던 날 남편이 말했다.

“넌 왜 그렇게 아플 때까지 일해?”

“그럼 할 일이 많은걸 어떻게 해.”

“네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해야지. 다 너처럼 일하지는 않아.”

“...”


일하기 싫은데 억지로 하는 건 아니었다. 일을 마무리하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니 버티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회사에 들이는 정성만큼만 하면 어떤 일을 해도 어느 정도 돈벌이는 하겠다는 생각. 은퇴 준비를 하며 돈을 모으고, 세계여행 다녀온 이후 생활비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아프고 난 후 고민이 해결된 느낌이다.


‘이 정도로 열심히 살면 뭘 해도 잘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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