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마지막 목적지 골드코스트에서 오클랜드행 비행기에 올랐다. 뉴질랜드에서는 2주간 머무를 예정이었다. 뉴질랜드는 호주보다 계획이 간단했다. 미리 가고 싶은 여행지를 정해두지 않았다. “크라이스트 처치에서 캠핑카를 빌려서 남섬 한 바퀴를 돌자.” 이것이 계획의 전부였다. 뉴질랜드는 주요 여행지마다 캠핑장이 있었고, 시설도 좋아 보였다. 우리가 가는 시기가 성수기는 아니어서 미리 예약할 필요도 없었다.
뉴질랜드에서는 jucy 캠핑카를 빌렸다. 우리가 빌린 차량은 jucy에서 가장 작은 캠핑카였다. 카니발 정도의 크기였고, 렌트비가 하루 7만 원 정도로 굉장히 저렴했다. 숙박과 교통을 동시에 해결하는데 7만 원 밖에 들지 않는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뒷자리는 두 사람이 잠만 잘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고, 의자 아래에는 수납공간이 있었다. 테이블 모드와 침대 모드가 둘 다 가능했으나 우린 거의 침대 모드로 해두고 사용했다. 차 트렁크에서는 간단한 조리가 가능했다. 작은 사이즈의 냉장고가 있었고, 싱크대가 있긴 했으나 음식물 저장 공간처럼 쓰였다. 조리용으로 휴대용 가스레인지도 제공했다. 호수가 보이는 도로를 달리다가 마음에 드는 풍경이 보이면 주차를 하고 캠핑 의자와 테이블을 꺼냈다. 트렁크 조리대는 풍경을 바라보며 라면을 끓여 먹는 데는 충분한 크기였다. 뉴질랜드에서 캠핑 경험이 좋았기에 차를 카니발로 바꾸고 캠핑을 다니자고 한동안 남편을 졸랐다. 남편은 “우리나라에는 뉴질랜드 같은 캠핑장이 별로 없잖아, 차가 작아도 캠핑장에서 다 해결이 가능해서 편했던 거야.”라고 말했다. 하긴, 차는 이동과 침대의 역할만 했고, 화장실, 샤워, 요리는 모두 캠핑장에서 해결했다. 사람도 많지 않고 깨끗해서 불편함이 전혀 없었다. 비용도 하루에 인당 만원 정도면 해결되었다.
뉴질랜드 남섬은 크고 아름다운 호수가 많았다. 우리의 첫 번째 목적지는 테카포 호수였다. 테카포 호수는 3000m가 넘는 높은 산들로 둘러 쌓여 있었다. 산 꼭대기는 빙하에 깎여 뾰족했고, 봄까지 채 녹지 못한 하얀 눈이 쌓여 있었다. 꼭대기에는 하얀 구름이 걸려 있어서 얼핏 보면 산이 구름 높이만큼이나 더 높아 보였다. 호숫가는 얕게 파도를 일렁이며 자갈을 굴렸고, 가만히 앉아 또르르 흐르는 자갈 소리를 듣는 것이 좋았다. 그 순간이 너무 행복했다. 여기만큼 아름다운 곳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하지만 뉴질랜드에서 우리가 찾았던 모든 장소는 어디가 더 좋았는지 순위를 매길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빙하 녹은 물이 흘러든 푸카키 호수는 옥색 빛깔이 아름다워 좋았다. 와카티푸 호수는 퀸즈타운에 있는 만큼 주변에 호수를 바라보며 식사를 할 수 있는 곳들이 많았다. 스카이라인에 오르면 리마커블산과 어우러진 와카티푸 호수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스카이라인에서는 호수를 바라보며 루지도 탈 수 있어서, 관광을 하기엔 가장 좋은 호수였다.
뉴질랜드는 다양한 트래킹 코스가 있었다. 밀포드 사운드 트랙이 가장 유명하지만 미리 예약하지 않으면 갈 수 없었다. 우린 뉴질랜드에서 가장 높은 쿡산 정상을 볼 수 있는 후커 밸리 트래킹을 하기로 했다. 가기 전 찾아보았던 후기에는 날씨가 좋지 않아 쿡산을 못 본 사람들도 많았다. 다행히 우리가 갔던 날은 쾌청했고, 트래킹 내내 쿡산 정상을 바라보며 오를 수 있었다. 트래킹이 만족스러웠던 우리는 그 이후 지나다 트래킹 코스 안내 표지판이 보이면 계속 걸었다. 밀포드에서는 예약 없이 갈 수 있는 루트번 트랙을 발견했다. 길지 않은 코스였지만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트래킹 내내 뉴질랜드에서만 사는 멸종위기 앵무새인 키아가 동반자가 되어 함께 걸었다. 번지점프를 하는 카와라우 강 구경을 갔다가도 트래킹 코스를 발견했고, 크레이피시를 먹기 위해 갔던 카이코우라에서도 트래킹을 했다. 이번 여행은 날씨 운이 좋아서 거의 비가 내리지 않고 맑았는데, 그 덕분에 트래킹 하는 내내 뉴질랜드의 절경을 가장 아름다운 빛깔로 감상할 수 있었다.
뉴질랜드에서는 다양한 야생의 동물들을 만날 수 있었다. 오아마루에서는 야생 펭귄을 볼 수 있다고 했다. 낮에는 바다에 머물다가 어두워지면 육지로 올라온다. 오아마루 해변만 가도 볼 수 있다고 듣긴 했으나 혹시 못 보면 어쩌나 해서 비싼 입장료를 내고 블루펭귄 콜로니로 갔다. 블루펭귄은 작고 귀여웠다. 뒤뚱뒤뚱거리면서 넘어지다 서다를 반복하며 짧은 다리로 해안을 올랐다. 한참을 구경하다 나왔는데, 거리에도 수많은 블루펭귄들을 볼 수 있었다. 야생의 동물들은 싱그러웠다. 야생의 동물들을 좀 더 만나보고 싶어 졌다. 마침 근처에 있는 카티키 포인트를 가면 야생 물개와 펭귄을 볼 수 있다고 하여 찾아갔다. 여러 마리의 물개가 짙푸르게 잔잔한 남태평양의 바닷속을 장난스럽게 헤치고 있었다. 헤엄치다 지치면 해변으로 나와 햇살을 즐겼다. 멀리서 그들의 낮잠을 구경했다. 자다가 간혹 눈을 떠서 자신을 쳐다보는 우리를 심드렁한 눈길로 잠깐 바라보더니 다시 잠에 들었다. 부러운 녀석들이다.
마지막 일정은 마치 꽃처럼 생긴 아카로아였다. 뉴질랜드 여행은 미리 정한 목적지 없이 밤에 맥주 한잔에 얘기를 나누다 정해졌다. 캠핑카 반납 전 어디를 가볼까 고민하며 역시나 맥주 한잔과 함께 남편과 뉴질랜드 지도를 보고 있었다.
“여기 다른 곳이랑 다르게 지형이 특이하다. 꽃처럼 생기지 않았어? 여긴 왜 쭈글쭈글한 거지?
“크라이스트처치 근처인데 캠핑카 반납 전 한번 가볼까?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지형이 신기하니 한번 가보자 해서 무작정 찾아갔던 곳이었다. 아카로아는 두 개의 화산 분화구가 침식되면서 생긴 뱅크스 반도에 있는 곳이었고, 뉴질랜드의 프랑스인 정착지였다. 아카로아는 대부분이 산이고, 분화구였던 항만 주변으로는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차를 반납하기 전 하루 일정으로 왔던 거라 아쉽게 트래킹은 할 수 없었다. 짧아서 더 아쉬움이 남았던 곳이다. 항구는 주변의 푸른 산과 옥색 바다 빛이 대비되어 아름다웠다. 특히 이곳의 피시 앤 칩스는 호주, 뉴질랜드에서 먹어본 피시 앤 칩스 중에 가장 맛있었다.
난 역사가 오래된 나라에 더 매력을 느꼈다. 여행을 떠나기 전 미리 그 나라의 역사 공부를 했고, 유적지와 박물관은 꼭 둘러보는 편이다. 역사가 오래될수록 그 나라 특유의 음식 문화가 있어서, 먹는 즐거움도 배가 되었다. 호주와 뉴질랜드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초록빛 들판 위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는 양,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정도였고, 그 나라를 대표하는 음식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호주, 뉴질랜드 여행은 큰 기대 없이 시작했었다. 하지만 호주 아웃백에서의 1주, 뉴질랜드에서 내키는 대로 보낸 2주는 대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에 감동하며 매일매일이 행복했다. 여행 기간이 짧아서 남는 아쉬움도 없었다. 아쉬우면 하루 더 그곳에서 머물면 되는 것이었다. 충분히 즐겼기 때문인지 다시 집으로 돌아갈 때도 슬프지 않았다. 한 곳에서 오래 머물며 생활하는 즐거움을 조금은 알게 된 것 같았다. 이전까지 나에게 여행은 일상 탈출의 즐거움이 더 컸던 것 같다. 이번 여행으로 진정한 여행의 즐거움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이 여행은 우리의 은퇴 계획에도 영향을 주었다.
우린 여행에 시큰둥해져 버렸다. 기껏해야 5일 정도 휴가를 내어 짧게 다녀오는 여행이 마냥 피곤하게 느껴졌다. 여행을 떠날 거면 적어도 2주는 가야 했다. 우리가 생각했던 세계여행의 모습도 변하고 있었다.
“세계여행을 2년 동안 연속해서 다닐 필요가 있을까? 그냥 가고 싶은 도시를 정해서 한두 달씩 머물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여행도 괜찮을 것 같지 않아?”
“여행이 아니라 살다 오는 거지. 세계여행 계획을 다시 고민 좀 해보자.”
세계여행 계획도 변해갔고, 여행 공백기 2년 때문에 우리가 생각했던 은퇴의 모습도 조금씩 변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