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에 은퇴 후 세계여행을 다녀오면 소소한 일거리를 찾을 생각이었다. 자영업을 하는 것도 생각했었다. 남편은 심야식당처럼 혼자 운영하는 작은 식당을 꿈꾸었다. 자영업을 하는 친구가 처음 장사를 시작한다면 프랜차이즈를 경험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거라 권했다. 찾아보니 프랜차이즈 박람회라는 것이 있었다. 프랜차이즈 박람회에는 그 시절 유행하는 아이템으로 여러 개의 프랜차이즈 업체가 점주를 모집하고 있었다. 유행 타는 아이템은 곧 인기가 시들해지는 것을 여러 번 보았기 때문에 끌리지 않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중 꾸준히 할 수 있는 걸 찾고 싶었는데 마땅치 않았다. 그즈음 은퇴 후 장사하다 망한 사람들 이야기, 우리나라에는 자영업자 비중이 너무 높다는 뉴스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전에는 그냥 넘겼던 기사들을 꼼꼼히 읽어보며 우리라고 다를까 걱정이 되었다.
“장사할 돈으로 차라리 굶어 죽지 않을 정도로 아껴 쓰래...”
“뭐 하나 남들보다 자신 있게 잘하는 게 없으니 걱정이긴 해.”
“은퇴 후 아껴 쓰면 한 달 생활비가 얼마나 들까? 차라리 아무것도 안 하고 모은 돈을 아껴 쓰는 게 낫지 않을까?”
세계여행을 다녀와서도 계속 일은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2년에 걸친 세계여행’ 대신 ‘내킬 때마다 한 달 여행’으로 방향이 바뀌었으니 전체적인 계획 점검이 필요했다. ‘여행’ 때문에 은퇴를 얘기했는데 어느덧 ‘여행’ 보다 ‘은퇴’가 더 중요하게 다가왔다. 소소하게나마 돈을 지속해서 버는 일이 어려울 수 있겠다는 불안감도 컸다. 그러다 보니 은퇴 후 필요한 예산을 정해서 그 돈을 모으면 은퇴하는 방향도 생각해보게 되었다.
결혼 이후 돈 관리는 내 담당이었다. 난 투명하게 가계 운영을 하겠다 선언하고 생활비 지출 내역을 구글 스프레드시트에 작성해서 남편에게 공유했었다. 하지만 남편은 우리가 돈을 얼마나 쓰는지 내가 사적으로 돈을 낭비하는 건 아닌지 관심이 없었다. 남편은 오직 “이번 달에 하이패스 요금 얼마 나왔으니 이체해줘.”, “우유랑 식빵 없길래 내가 사놨어. 얼마 보내줘.” 등 생활비로 지출되어야 할 비용을 본인이 쓰게 되었을 때 제대로 돌려받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난 간혹 생활비로 하기로 했던 옷이나 화장품 등을 내 돈으로 살 때도 있었다. 그런 얘기를 하면 남편은 “불평하지 말고 너도 그런 건 철저하게 생활비로 해야지.”라며 가계의 재정상태보다는 각자의 용돈을 더 중요시했다.
은퇴 후 필요 예산을 정리하려니 그동안 열심히 작성한 가계부가 드디어 빛을 발했다. 가계부에 기록한 지출내역을 살펴보며 예산계획을 세우기로 했다. 맞벌이다 보니 한 달 수입이 적지는 않았다. 물건을 살 때 가격은 보지도 않고 “사고 싶으면 사”하며 살았다. 간혹 마음에 드는 물건을 발견하면 결제를 할 때서야 이렇게 비싼 거였나 하고 후회할 때도 있었다. 회사일로 스트레스를 받다 보니 충동구매하는 일도 잦았다. 식사도 거의 외식을 했다. “몸보신해야 하니까 소고기 먹자.”, “오늘은 월급날이니 소고기 먹어야지.”, “힘든 하루였으니 소고기 먹자.” 라며 그 비싼걸 자주도 먹었다.
가계부는 둘이 같이 쓴 생활비만 적었으니 각자 쓰는 용돈과 각종 세금, 보험 등을 합하면 한 달에 거의 400~500만 원 정도는 지출했다. 물욕이 없는 편이라 생각했는데 2인 가정치고 과했던 것 같아 반성하게 된다. 지출한 개별 항목들에는 은퇴 후 줄일 만한 것들이 많아 보였다. 특히 충동구매의 흔적인 ‘기타구입’ 비용은 100만 원 이상 절약 가능할 거다. 회사를 그만두면 집밥 먹는 비중이 늘어날 테니 ‘(외)식비’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거의 외식을 했는데도 ‘장보기’ 비용이 저렇게나 많은 건 자기 전 치르는 의식의 비용이었다. 은퇴하면 술도 좀 줄여야겠다.
개별 소비 항목을 기준으로 꼭 필요한 만큼 사용 시 한 달 생활비가 얼마나 들지 다시 계산을 해보았다 (아래 이미지). 한 달에 250만 원으로 생활하고, 연간 지출 비용 300만 원을 포함하여 1년 예산은 3300만 원이면 충분할 것 같다.
‘은퇴 후 생활비 계획’을 보고 남편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한 달 용돈이 10만 원이라고? 너무한 거 아니야?”
“비자금을 잘 굴려봐. 지금 용돈도 거의 안 쓰고 모으고 있잖아. 충분할 거 같은데?”
지금 용돈이 50만 원이다. 하지만 둘 다 50만 원을 채 쓰지 못하고 조금씩 모으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리고 각자 어느 정도의 비자금이 있어 그 돈으로 주식 투자를 하고 있었다. 개인 용돈은 각자 능력껏 마련하기로 한다.
결혼 전부터 부모님에게 드리는 용돈이 있었다. 월급을 받을 때는 부담되지 않는 금액이었다. 하지만 은퇴 후 예산을 계산해보니 꽤 큰돈이다.
“은퇴하면 부모님 용돈은 안 드려도 되지 않을까?”
“에이, 그건 아니지. 일찍 은퇴하는 것도 죄송스러운데.”
남편의 얘기에 부담되지만 포함하기로 했다. 남편은 철없어 보이다가도 어른 같기도 하고 그렇다.
우린 둘 다 개인연금을 들고 있었다. 은행 다니는 친구 때문에 가입했는데, 은퇴하려고 보니 좀 더 많이 넣을걸 후회가 된다. 퇴직금도 일시불 수령이 아니라 연금으로 받기로 한다. 그리고 만 55세부터 받을 수 있는 연금액을 확인해보았다. 10년 동안 분할 계산한 연금액은 월 100만 원 정도는 될 것 같다. 다만 내가 남편보다 6살 어리기 때문에 둘 다 연금을 받아 생활하려면 시간이 좀 더 걸린다. 남편은 “이럴 줄 알았으면 연상을 만날걸 그랬어.” 하며 너스레를 떤다.
만 65세부터 받을 국민연금도 알아보았다. 남편과 나는 대학시절 아르바이트할 때부터 국민연금에 가입되어 있었다. 졸업 후 취업하기 전까지 납부예외기간은 현재 납입하는 연금액 기준으로 추가납입을 할 수 있었다. 회사 지급 부분 없이 전액 납입해야 했기 때문에 부담은 좀 되었지만 어차피 우리가 돌려받을 돈이니 저축한다 생각했다. 추가 납입한 금액은 연말정산 시 공제도 받을 수 있어 꽤 괜찮았다. 추가납입 후 국민연금 앱에서 예상 연금액을 확인해보았다. 은퇴 이후에도 일정기간 최소 금액을 납입한다면 각자 90~100만 원 정도는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거기다 주택연금까지 받으면 내가 만 65세부터는 연금만으로 생활이 가능할 것이다.
은퇴 생활비를 마련하려면 앞으로 10년은 더 일해야 했다. 하지만 우린 더 이상 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집을 팔기로 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을 팔고 집값이 좀 더 저렴한 곳을 찾아가기로 했다. 지방도 좋은 위치의 새 아파트는 수도권만큼 비싸지만, 한적한 동네의 오래된 아파트나 주택을 매매하면 차액이 발생할 것이다. 연고지가 없으면 적응에 어려울 수도 있으니 친척들이 많이 사는 곳을 후보로 살만한 곳의 집값 시세를 알아보았다. 그렇게 계산한 차액으로 우리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계산했다. 만 55세부터는 개인연금을 받을 테니 1년 예산 3300만 원을 써도 어느 정도 버틸만할 것 같다. 이건 집을 팔고 남은 차액의 원금으로만 계산한 것이다. 차액을 그냥 은행에 두지는 않을 것이고, 투자를 하기로 했다. 그 수익을 고려하면 그럭저럭 물가상승분 보전이 될 거라는 낙관적인 생각도 있다.
아직 갚아야 하는 대출이 있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서 예비비도 있어야 하고, 여행을 자주 다니기 위해 은퇴하기로 했으니 여행비도 좀 더 마련해야 한다. 해외에서 한 달 이상 체류하면 의료보험비가 들지 않는다. 그 외 고정지출 비용도 조금은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숙박과 항공권만 여행비 예산으로 잡고, 가서 쓰는 비용은 생활비 내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대략 얼마나 필요할지 목표액을 잡았다. 생활비를 줄여서 저축 비중도 늘리기로 한다. 그럼 얼마나 더 모아야 마련 가능한 돈일지 계산해 보았다.
우리가 처음 은퇴하기로 한 내 나이 마흔, 남편 나이 마흔여섯 은퇴는 어려웠다. 하지만 1년 정도만 더 모으면 가능해 보인다. 내 나이 마흔 하나, 남편 나이 마흔일곱이면 은퇴가 가능할 것 같다. 물론 계획대로 살아야 가능한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