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밤 안개 속

나의 인생이야기 (4)

by Demoo

생각만큼 행복한 졸업식은 아니었다. 집을 나온 뒤 처음으로 졸업식에서 할머니를 봤다. 어디서 듣고 온 걸까. 어떻게 알고 온 걸까. 쪼그라진 손으로 돈 몇 푼을 건네는 할머니를 나는 싸늘하게 뿌리쳤다.


“할머니한테 그러는 거 아니야…”


할머니는 나를 참 아꼈었다. 그러나 어미를 함부로 대하면서, 어떻게 그 새끼에게는 사랑받기를 원한 걸까. 나는 싸늘하게 돌아섰다. 아마 크게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날 삼촌도 같이 왔었다고 한다. 꽃다발이 아닌 조그만 몽둥이를 들고. 시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다. 생판 남이어도 저렇게는 안 했을 텐데. 돈 때문에. 그깟 돈 때문에. 사람이 얼마나 추악해지는지 나는 너무 이른 나이에 알게 되었다. 그날도 우리 가족은 외식 한 번 제대로 못하고 단칸방으로 돌아가 짜장면을 시켜 먹었다.



사람들에게는 살아가는 이유가 필요하다. 할머니에게는 내가 그 이유였던 것 같다. 그저 공부 잘하는 장손 자랑하며 사는 것이 그녀의 낙이었나보다. 일 년 뒤 할머니가 위독하다는 말을 들었다. 오기 싫은 것은 알겠지만, 꼭 와달라고 어머니가 말했다. 다시 보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렇게 차갑게 돌아선 내가 어떻게 그 사람을 다시 볼까. 그러나 병원에 누워있는 할머니를 보고 그런 고민이 필요 없음을 알게 되었다. 이미 그 사람은 내가 알던 할머니가 아니었다. 나무토막. 참 작은 나무토막. 나는 사람이 그렇게 작다는 것을 그날 처음 알았다. 눈을 깜빡이는 것 말고는 그녀는 이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사람에게 나는 화도 낼 수 없었다. 그냥 손을 꼭 잡으며 “할머니 나 왔어.”라고 말했다.

그리고 며칠 있다가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어린 손주에게도 일 억만 주면 나가 살겠다고 말하던 사람. 내 어머니와 아버지, 누나에게 가장 큰 상처를 준 사람. 그녀의 끝은 참 작고 초라했다. 그렇게 성당을 열심히 다녔으니 좋은 곳에 갔겠지… 솔직히 스스로 원망스럽지만, 가끔 그립다. 그리고 상상을 한다.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면. 삼촌도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고, 다른 가족들처럼 명절에 친척들과 어울리고. 나 역시 가슴에 상처 없이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성숙한 어른으로 자라났다면. 할머니도 손주 자랑하고 다니면서, 행복하게 살았다면. 그리고 사회에서 힘들고 지친 나를 꼭 안아주고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손에 용돈 몇 푼 쥐어준다면. 아마 할머니도 좀 더 오래 살았을 것 같다. 그러나 내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장례식장에서 고모들과 삼촌도 만났다. 그들은 놀랍도록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나를 대했다. 내게 사과하는 사람도 있었다. 삼촌은 놀라우리만큼 부끄러움도 죄책감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사람은 사실 정상인이 아니었다. 우리는 그냥 성격이 나쁜 거로만 생각했지만, 사실 병원에 입원시키거나 사회와 격리시켜야 할 사람이었다. 정상적인 어른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매일 집에서 물건을 부수고 난리 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는 말 그대로 고장 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런 못나고 별 볼일 없는 사람이 내 인생에 그렇게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게 지금도 화가 난다.



대학교에서 처음 동기들을 봤을 때 많이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 친구들은 나와 달랐다. 마치 예쁘게 동글동글하게 빚은 눈처럼 하얗고 빛이 났다. 사랑받고 건강한 자아를 지니고 있었고, 그들은 대학 생활을 즐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당시 나는 입학하자마자 고시를 준비해서 합격하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학문을 배울 기대에 부풀어 있는 그들을 보면서 나는 알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대학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이상하게 당시의 나는 늘 화가 나있었다.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 모르겠지만, 너무 화가 나서 가만히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마치 학습능력을 모두 잃어버린 사람처럼 공부가 되지 않았다. 아르바이트, 학점, 고시 준비 세 가지를 모두 하려고 하니 무엇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었다. 정서적으로 불안하고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내가 상처받은 만큼 사람들에게 상처를 나눠줬다. 고등학교 때 간신히 버텨오던 정신이 수능이 끝나자 무너져 내린 것 같았다. 술 마시고 우는 날이 많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그 시절에 평생 함께할 친구들을 만났다는 것이다. 그 친구들의 도움으로 겨우겨우 살아갔다. 그 당시에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있다. 새벽이 오기 전이 가장 어둡다고. 그리고 너는 지금 그 시기에 있는 거라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그 생각이 맞았다. 그러나 그 시기가 정말 말도 안 되게 길다는 것은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다.

우울증은 계속 심해졌고, 전문 병원을 다닐 돈은 없었다. 학교 보건소에서 간간히 약을 타먹었다. 그 시절에는 스스로가 벌레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누군가가 나를 꾹 눌러 죽여줬으면 했다. 불면증이 심해졌고, 병원에서 스틸녹스라는 수면제를 처방받았다. 그리고 수면제에 중독됐다. 병원에 이야기하지 않고 수면제 여러 알을 한꺼번에 먹곤 했다. 원래 정량은 1/4알이었으나 나는 3알 이상씩 먹었다. 수면제를 많이 먹으면 오히려 잠이 깬다. 그리고 술 취한 사람처럼 뇌가 망가지기 시작한다. 나는 아무 목적도 없이 비틀거리며 밤거리를 헤매었다. 그리고 새벽에 집에 들어와 하루 종일 잤다. 당연히 시험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나는 계속해서 고시에 떨어졌다. 사실 시험이 문제가 아니었다. 치료부터 받는 게 우선이었으나 당시에는 그걸 몰랐다. 그때는 시험을 그만둘 수 없었다. 가정형편은 당연히 계속 악화되고 있었고, 우리 집에서는 내가 유일한 희망이었다. 고시를 그만둔다고 차마 집에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 역시 내 꿈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누구보다 간절했지만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 하루하루 조금씩 몸과 마음이 병들어갈 뿐이었다. 점점 꿈과 멀어진다는 게 느껴졌고, 그게 너무 가슴 아팠다. 발버둥 칠수록 잡으려고 애원할수록 꿈에서 더 멀어져 가는 게 내 청춘의 이야기다. 그렇게 깊은 밤안갯속을 헤매는 것처럼 내 20대가 끝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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