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13일(금) 류코쿠(龍谷) 대학 문학부 철학과 교육학 전공의 후다노 카즈오(札埜和男, FUDANO Kazuo) 교수를 만났습니다. 후다노 교수는 지난번 저의 특강 때 왔었고, 모의재판에 관심 있다고 해서 한번 보자고 약속했었거든요. 저를 초청한 데와 교수가 만남을 주선했고, 통역은 AI 프로그램을 이용했습니다.
후다노 교수는 교직 과정을 이수하는 학생들에게 모의재판 형식으로 수업한다고 합니다. 저는 한국의 중고등학교에서 모의재판 형식의 법 교육에 부정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세상의 일을 법적으로 보는 건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재판 형식에서는 유죄냐 무죄냐 또는 원고 승소냐 피고 승소냐 하는 결론에 치중하거나 재판에서 이기려고 상대방을 공격하는 방식에 빠지기 쉽거든요.
재판에서는 필연적으로 관련 법에 따라 판단하는데, 자칫 단순하게 법조문의 해석에 의존하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와 사회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으면 정의로운 판결은 어렵습니다. 그만큼 고민하는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고요. 그런 조건들을 갖추기는 어려운 일이죠. 법 교육 이전에 인권 교육과 공감 능력 기르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법은 사용하는 용어 자체가 일상적이지 않아서 법의 언어를 구사하는 자체가 권력적입니다. 학생들이 법을 쉽게 배우거나 재판 형식에만 치우치면 권력 중심 사고를 갖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후다노 교수와 대화하면서 조금은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모의재판은 단순한 법 적용을 넘어서 연극적 요소에 따른 ‘역할 체험’을 하게 되므로, 텍스트 외의 감정, 관계, 상황 전개를 이해하기 위해 종합적 사고를 할 수 있으니까요. 제가 연극에 관심을 가지고 공연에 참가한 배경이기도 하고요. 후다노 교수는 문학적으로 접근해서인지 “범죄자” 역할의 연기 경험을 통해 누구나 범죄자가 될 수 있다는 자기반성의 기회가 생긴다는 의견입니다.
후다노 교수가 일본의 문학 작품을 통해 모의재판을 진행한다고 하면서, 한국인 누구나 알 수 있는 문학 작품이 어떤 게 있냐고 묻더군요. 금세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부끄러웠습니다. 문학책을 너무 읽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노벨문학상 받은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얘기했습니다. 황석영 작가를 떠올리긴 했는데, 막상 여러 세대에 걸쳐 알 수 있는 작품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후다노 교수의 책을 선물 받았습니다. 겉표지에서 <羅生門>(라쇼몬)이 눈에 띄더군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죠. 부끄럽게도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작가의 작품인지는 몰랐습니다. 다만, 작가 이름을 보고 아쿠타가와상을 떠올렸습니다. 생각해 보면 라쇼몬처럼 재판에 적합한 소설이 없을 듯합니다.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 무엇이 진실인지 파악해야 하니까요. 도저히 진실을 알 수 없는 상황도 있겠고요. 그럼에도 모순된 진술을 총괄하여 판단한 다음 사실 관계를 확정하고 법을 적용해야 하는 게 재판이죠.
후다노 교수는 <법과 언어>라는 책에도 저자로 참여했다고 합니다. 우리말로 번역이 되었는데, 절판이네요. 일본어책을 구매했습니다. 후다노 교수가 박사학위 논문을 출판한 책은 <법정에서의 방언>이라는 제목이네요. 이 책까지 구매해서 읽기는 쉽지 않지만, 도서관에서 빌려 제목이라고 보려고는 합니다.
이번 교토에서의 연구년이 끝나기 전에 한국의 문학 작품을 통해 모의재판을 구성하는 작업을 해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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