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권두섭

by 마정열

그리고 동하의 관심을 끄는 또 한 사람은 2그룹을 담당하는 권두섭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자취생 역사학도 정도로만 여겼는데 그의 성경 지식은 성경에 무지한 동하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그는 주일이면 그룹원을 이끌고 성경 공부를 했다. 내용은 주로 전도사님의 설교에 대한 부연 설명이었다. 그러나 그의 성경 이해는 흥미로웠다. 아니 독특했다.

동하가 세 번째 교회에 나가던 날, 전도사님의 설교는 빌라도의 죄에 관한 것이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결정적 작용을 한 사람은 빌라도입니다. 그가 원했던, 원치 않았던 역사적 책임은 그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빌라도와 예수님의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이것이 자신의 법정에 선 예수님에게 물은 빌라도의 심문내용입니다.
“내 왕국은 이 세상 것이 아니다. 만일 내 왕국이 이 세상 것이라면 내 제자들이 싸워서 나를 유대인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했을 것이다. 내 왕국은 결코 이 세상 것이 아니다. 나는 오직 진리를 증언하려고 났으며 그 때문에 세상에 왔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는 빌라도의 심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나라를 건설하는 메시아였습니다. 그 진리 때문에 이 세상에 왔으며 그 진리를 증명하고자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예수님이 증언한 진리가 무엇이었을까요?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은 진리이고 인간을 구속하는 것은 비진리입니다. 인간은 예속과 자유 사이에 존재합니다. 예속의 길에 서면 비진리에 속하게 되고, 자유의 길에 서면 진리에 속하게 됩니다.
빌라도가 아는 것은 통치권의 안정과 더 큰 출세뿐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진리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진리가 목숨을 주고서라도 구현해야 할 지상과제였습니다.
타락한 사회의 특징은 자신의 입신출세를 위해서는 옥석을 가릴 필요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시세에 따라, 자신의 안전을 위해 요령껏 처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빌라도도 예수가 무죄함을 알면서도 카이사르의 충신이 되고자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타락한 세상에 진리를 전하고자 십자가의 형틀로 스스로 걸어갔습니다.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것은 진리를 찾는 것이고,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는 길입니다.


젊은 전도사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그는 예수님의 삶 속으로 설교를 듣는 무리를 이끌고 들어갔다.
동하는 잠시 예수의 삶과 자유를 생각했다. 잘 연결되지 않았다. 동하는 예수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동하는 진리를 생각해 보았다. 무엇이 진리인지 지금껏 배워본 적이 없었다. 생각은 이어지지 않고 그 자리에서 끊겼다.
예배 후 그들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소회의실로 자리를 옮겼다.
“누가 뭐래도 예수님 죽음의 첫 번째 책임은 빌라도야. 그가 진정으로 살리고 싶었으면 총독이라는 막강한 권력으로 예수님을 살릴 수 있었어.”
자리에 앉자마자 준기가 입을 열었다. 입시를 앞둔 고3이건만 단 한 주도 예배를 거른 적이 없는 준기다. 그는 대학 진학도 신학대로 일찌감치 결정했다고 했다.
“무조건 빌라도를 욕할 수만은 없잖아. 성경에 나와 있듯이 그는 재판에서 빠지고 싶어 했어. 결국 예수님을 죽음으로 이끈 것은 당시 부패한 유대의 권력층과 무지한 유대 민족이야.”
성규가 말을 받았다.
“그런데 빌라도는 왜 그리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을까?”
신애가 진정 궁금한 표정을 지으면 성규를 바라보았다.
동하는 성경을 뒤져 그 부분을 찾아보았다. 마태복음 27장을 펼쳤다.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예수를 넘겨주었다. 그들의 요구는 예수를 처형하라는 것이었다. 빌라도는 주저했다.
유대의 명절을 맞이하면 총독이 군중의 소원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전례가 있었다. 그때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었다.
빌라도가 군중들에게 물었다.
“너희는 내가 누구를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예수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군중을 선동하여 바라바를 풀어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다.
군중들이 대답했다.
“우리는 바라바가 풀려나기를 원합니다.”
빌라도가 물었다.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
군중들이 소리쳤다.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빌라도는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찌 이리도 잔인한가? 그가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군중들은 더욱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십시오.”
빌라도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들의 청을 외면할 경우 민란이 일어나리라 염려되어, 물을 가져다가 군중들 앞에서 손을 씻으며 말하였다.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죄가 없다. 너희들이 피의 대가를 당하라.”
군중들이 다 대답하였다.
“그 피의 대가는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다 감당하겠습니다.”
이에 빌라도는 바라바를 군중들에게 놓아주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었다.


성경 속의 빌라도는 고뇌하는 인간이었다. 그는 피 묻은 손을 씻었다. 피의 대가는 유대인에게로 돌아갔고, 그 결과 유대인들은 유럽 사회에서 이천 년 동안 온갖 박해를 받았다.
“본디오 빌라도, 폰티우스 필라투스. 성경에서는 왜 그를 그렇게 갈등하는 인물로 묘사했을까? 그것은 아마 그 당시 로마제국의 선교를 위해 로마와 적대적 관계를 피하기 위해 그랬던 것은 아닐까? 성경에는 빌라도는 재판에서 예수를 보호하려고 했지만, 유대인들의 압력에 굴복한 것처럼 되어 있지. 하지만 이는 로마제국과 그리스도교 공동체와의 갈등을 피하고자 한 성경의 편집자들이 예수 이야기를 편집하면서 삽입한 이야기일 거야. 오히려 로마제국의 권력을 상징하는 인물인 빌라도에게 대중들의 지지를 받는 예수는 위험인물이었을 거야. 이는 예수가 못 박혀 매달린 십자가에 '유대인의 왕'이라는 패가 달린 것이나, 예수에게 유대인의 왕인지 물은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따라서 예수를 보호하려고 하기는커녕, 예수를 처형하는 데 눈 하나 까닥하지 않았을 거야. 골치 아팠던 지역인 유대의 총독으로서 그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메시아를 자처하는 선지자, 독립당원, 열혈당원들의 재판했을 거야. 그리고 그들을 사형시키는 것은 일상사였을 테지.”
“그럼 복음서가 진실이 아니라는 거예요?”
준기가 눈을 동그랗게 듣고 권두섭의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고 물었다.
“진실이냐, 아니냐의 문제는 아니고... 초대교회는 경전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어. 당시에는 입으로 전해지는 구전과 예배형식만 있었을 거야. 그 당시에는 예수님의 제자들로부터의 말이 최고의 권위를 갖는 사도성에 권위를 두고 있었지. 사도들이 죽고 난 뒤에 교회에서 내려오던 구전 등은 심하게 왜곡되거나 타락하기 시작했어. 그 당시에는 경전의 권위 있는 기준도 없었고, 그러한 기준을 강요할 만한 권위도 없었기 때문에 누구든지 경전을 저작할 수 있었고 오히려 장려되기도 하였을 거야. 더구나 그 당시 초대교회들은 헬레니즘 문화권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논쟁과 작문을 좋아하는 당대의 지식인들에겐 예수님의 이야기는 더할 수 없는 유혹 거리였겠지. 누구든 자신의 목적에 따라 첨삭도 가능했으니 말이야.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복음서는 대략 예수님 사후 50년에서 100년 전후에 저작된 것으로 보고 있어. 4대 복음서 중에 최초로 저작된 것으로 보는 마가복음은 수난복음이라 할 정도로 예수의 수난과 십자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여기에는 예수의 탄생 이야기는 없지. 그리고 누가복음은 극적인 드라마 형태와 신비적인 요소가 강하게 접목된 작품이야. 복음서의 저자로 알려진 마가와 누가는 바울의 동역자로 알려져 있지. 바울의 전도는 주로 동방세계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어. 그러한 선교의 목적에 맞게 복음서를 편찬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닐까?
예수님의 사역이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던 것처럼 마태복음은 동일한 유대민족을 대상으로 하고 기록된 것으로 판단돼. 유대적인 생활풍습과 팔레스타인식의 장소적 시대적 특색이 곳곳에 그대로 남아 있고,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강조하며 그 증거를 제시하고 있지. 4대 복음서 중 가장 나중에 집필된 복음서는 요한복음이야. 100년 전후로 쓰인 것으로 보고 있지. 이 시기 그리스도교는 크나큰 팽창을 하게 되었어. 팔레스타인을 떠나 동방세계에 확고한 교회조직을 형성하게 되었고, 그 세계 지성인들에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더욱 지적이고, 철학적인 내용이 요구되었겠지. 그리고 요한복음에 나타난 유대인은 저주의 대상으로 표현되는데 이는 100년경의 기독교가 유대교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하고, 교회 내에서도 유대인을 찾아보기 힘든 시대에 써졌다는 것을 의미하겠지. "

권두섭은 긴 이야기를 이어갔다. 동하는 그 이야기를 듣는 동안 지난주에 교육관 3층 복도에서 짧은 순간 목격했던 광경이 생각났다.

“삼위일체를 왜 부정하는 거지?”
교회 담임 목사의 아들인 요한은 목소리를 높였다.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는 니케아 공회의 이래 교회의 핵심 교리야. 이것을 부정한다면 교회에 나올 필요가 없지 않은가?”
“오해하고 있군. 나는 삼위일체를 부정하려는 게 아니야. 또 다른 면이 있다는 거지. 다양성을 허용하지 못하는 조직은 경직되어 무너지게 마련이야. 그리고 니케아 공회의는 다양한 인종을 하나의 이념으로 묶어 지배하고자 했던 당시 로마제국의 상황을 반영한 것이라는 것은 너도 알 텐데.”
권두섭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요한은 날카로운 눈으로 권두섭을 쏘아보면 그의 말을 받았다.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순수성을 상실하는 거지.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 다양한 교리의 해석은 가능하지만, 핵심은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종교는 존재하는 거야. 삼위일체는 기독교의 핵심이다.”
“다시 원점이군. 예수님의 다른 면을 본다고 예수님이 인류사에 미친 영향은 결코 부인되지 않아. 예수님이 성경 속 모습 그대로가 아니라 또 다른 모습이 있다고 예수님의 정신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지. 오히려 더 따르고 배울 것이 많은 예수님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때 복도의 끝에서 김장로의 모습이 보였다. 논쟁은 거기서 끝이 났다. 권두섭은 서둘러 그 자리를 떴다. 그의 뒷모습을 김장로가 매서운 눈으로 쏘아보았다.

“4대 복음서는 서로 충돌되며 모순도 되는 것이 있고 잘 들어맞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4개의 복음서를 한데 묶음으로써 기독교는 생명력을 가질 수 있었다고 생각해. 차이와 다름이 조화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지. 복음서 간의 충돌과 조화야말로 기독교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권두섭의 말은 그렇게 끝을 맺었다. 그룹원들은 권두섭의 말을 경청했다. 그는 그들에게 새로운 신학적 지식을 선사했다. 그것은 동하에게도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교회의 관리자들은 권두섭을 불신의 눈길로 보고 있었다. 동하는 교회의 몇몇 지도자와 권두섭이 갈등 관계에 있다는 말을 기형을 통해 들었다.
권두섭에 대한 호기심이 높아지면서 동하는 기형에게 권두섭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어보았다. 기형은 자신도 자세히는 모르겠다면서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작년 여름, 교회 MT에서 목격했던 일이라고 했다.


저녁 식사 후, 젊은 전도사와 청년부 교인들이 교회의 사회 참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교회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하려면 돈이 당연히 필요로 했고, 그 돈은 교인들의 헌금에서 나오는 것이다. 전도사는 헌금의 필요성을 이야기했고, 특히 십일조에 대해 성경을 인용해 가며 당위성을 강조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몫이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자들은 그들 소산 중 십 분의 일을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 모임에서 권두섭은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모임은 순조롭게 끝났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손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 위해 더욱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다하기로 맹세를 하고 모임을 마무리했다.
나가는 전도사의 뒤를 권두섭이 따라 나갔다. 둘은 건물 밖 어둠 속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교회의 공공사업을 위해 성도들이 헌금하는 일은 매우 좋은 일이며, 또 장려할 만한 일입니다. 교회라는 기관이 돈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은 어린아이라도 압니다. 그렇다고 성직자들이 십일조를 신앙생활의 필수조건으로 주장한다면 이는...”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말씀대로 살면 되지 않을까요?”
전도사가 권두섭의 말을 자르고 나섰다. 권두섭은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것은 공갈이며 협박입니다.”
권두섭의 어조는 단호했다.
“말이 조금 지나치다고 느껴지는데요.”
전도사의 어조도 차갑게 가라앉았다.
“십일조는 모세의 율법이며 유대교의 전통적 제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십자가의 제물로 바침으로써 인류의 구원이 가능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모세의 옛 율법은 폐지되었고, 새로운 언약이 성립되었으며, 그 기초 위에 세워진 것이 우리의 교회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모세의 옛 언약, 즉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예수님의 새로운 복음의 언약 아래 있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폐기된 율법들은 다 무시하고 지키지 않으면서 모세 율법 중에서 왜 하필이면 십일조 하나만을 끄집어내어 그것만은 필수라고 강조하며 엄수하라고 하십니까? 그것은 아무리 선의로 해석해도 잿밥인 듯합니다.”
전도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알고 있으면서 왜 성도들 앞에서는 이야기를 못 할까요? 이 땅의 현실이 종교적 이상을 실천하기에 너무 척박하기 때문일까요? 척박하기에 더욱 종교적 순수함을 지켜야 하는데... 말씀 고맙습니다.”
그 말을 남기고 전도사는 풀벌레 우는 여름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전도사와 권두섭의 대화가 목사의 귀에 들어갔을까? MT 이후 첫 주일, 목사의 설교는 십일조에 관한 것이었다.


구약에 기록된 모든 율법과 역사와 인물들은 이중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그 당시의 실제 역사를 보여주고, 다른 하나는 철저하게 장래 일에 대한 예표적 기록입니다. 그리고 그 장래 일이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있습니다. 십일조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일조 역시 예표적이고 계시적인 율법입니다.
오늘날 십일조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는 여러 갈래로 나뉩니다. 어떤 이는 십일조야말로 하나님의 것이고 복의 근원이니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야 된다고 주장하고, 어떤 이는 십일조는 구약의 율법으로 신약시대에는 드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또 교회 밖의 어떤 이들은 십일조를 예로 들어 교회를 비판하고 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분명 소득의 십의 일을 십일조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십일조를 통하여 무엇을 계시하고자 하셨을까요?
십일조는 열에 하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성경을 유심히 보면 ‘열’이란 수는 ‘모든’을 의미하는 숫자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십일조가 무엇을 계시하기 위함인지 아브라함이 드린 십일조의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창세기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시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이 누구입니까? 이삭은 아브라함이 백 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얻은 귀하고 귀한 아들입니다. 이삭이 얼마만큼 자랐을 때였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더니 그 귀한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하소연을 하였습니다.
하나님, 제발 그런 말씀 마십시오. 이삭은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제게 약속했던 바로 그 아들 아닙니까? 차라리 저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아브라함아, 너는 이삭을 번제물로 바쳐야 한다.
무슨 이유로 하나님은 그렇게 이삭 하나에 연연하시고 완고하셨을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그토록 완고하셨던 이유를 아십니까? 그것은 그 모든 것들 중에 오직 하나, 이삭을 바치는 것만이 십일조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토록 몰인정하시고 완고하신 것입니다.
왜 이삭을 드리는 것만이 십일조일까요? 그것은 이삭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그림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에게 아들을 주고 네 자손을 통하여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셨고, 그 이삭을 통하여 이스라엘이라는 큰 민족이 실제로 이루어졌는데, 이삭과 이삭을 통하여 이루어진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림자였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 하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번제물로 드려 십자가 위에서 죽일 것에 대한 계시요, 예표였던 것입니다.
이삭이 아니면 안 되는 이유는 예수가 아니면 이 세상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누구입니까? 예수가 바로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여호와 하나님이 숨어계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직접 몸 찢고 피 흘리고 죽기 위해 예수 안에 숨어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직접 죽지 않으면 이 세상 사람들은 다 죄 사함을 얻지 못하고 지옥불에 던져질 것이며, 구원받을 길은 영원히 없기 때문에 십자가 위에서 몸 찢기고 못 박혀 죽임을 당하시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죗값을 대신 치르신 것입니다.
그것이 십일조입니다. 열의 하나, 모든 것들 중에 하나, 그러나 아무것도 그 하나를 대신할 수 없는 오직 하나. 이 모든 우주 가운데에서 죽어 너희를 죄와 사망 가운데서 구원할 수 있는 오직 하나. 그렇게 우리에게 십일조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사라에게서 낳음 받은 이삭같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었던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낳음 받아 예수 그리스도로 오셔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주 앞에 내려놓고 그에게 귀의하기를 맹세한 성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모든 것을 우리에게 내주었듯이 우리도 주 앞에 우리의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은혜의 구원이 온 세상에 가득 퍼지기를 기도합시다.


그날 목사의 설교는 열정적이었다고 기형은 말했다. 많은 교인들이 감동을 받았고, 다음 주 주보에는 어느 때보다 많은 헌금자 명단이 올랐다고 했다. 동하는 기형에게 그 말을 듣는 순간 주보를 보고 헝클어졌을 권두섭의 얼굴을 상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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