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하가 권두섭을 교회 밖에서 만난 것은 2학기 중간고사를 앞둔 시점이었다. 중간고사가 가까워지면서 동하는 학교 근처의 도서관에서 책과 씨름을 하였다. 1학기 성적이 기대만큼 좋지 않아 2학기는 바짝 긴장하여 성적을 올리자는 심산이었다.
동하의 성적은 꽤 준수한 편이었다. 반에서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었고, 집에서도 기대하고 있는 학생이었다. 동하 역시 부모님의 기대를 아는 만큼 그 기대에 어긋나지 않으려고 노력을 했다.
동하는 밤 10시, 도서관의 폐관 시간에 맞춰 책을 챙겨 도서관을 나섰다. 집으로 가는 도중 편의점이 눈에 띄었다. 동하는 라면 하나로 출출해진 배를 채울 요량으로 편의점을 들렀다. 거기서 동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권두섭을 만났다.
“어 선생님, 여기서 일하세요?”
“어 동하구나. 여긴 웬일이냐?”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집에 가는 길이예요. 출출해서 라면 하나 먹으려고요.”
“그래, 좀 기다려라. 나도 곧 끝나니까 같이 먹자.”
동하는 잠시 밖의 의자에서 권두섭을 기다렸다. 근무교대를 마치고 그가 나왔다.
“우리 무얼 먹을까?”
“라면 먹어요.”
“그럼 우리 다른 데서 먹자. 알바하는 데서 먹기가...”
둘은 밤거리로 나왔다. 잠시 걷다가 그가 동하를 돌아보며 말했다.
“밖에서 사 먹지 말고 내 방에 가서 라면 끓어 먹자.”
“선생님 집이요?”
“그래. 여기서 안 멀어.”
권두섭이 사는 곳은 산 아래에 붙어있는 연립주택의 지하방이었다. 언덕에 세워진 집이라 대문에서 보면 지상집인 것 같은데, 권두섭의 방 뒷창문은 집의 뒷길과 거의 붙어있었다. 다행인 것은 집 뒤는 주택가가 아니고 산과 접해 있어서인지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방은 주방과 거실의 구분이 없는 원룸이었다. 거실은 책과 옷가지가 아무렇게나 방바닥에 널려 있었다. 한쪽에는 책상이 있고, 그 옆에 한 번도 갠 적이 없을 듯한 이불이 구겨진 채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알바하세요?”
동하가 라면을 끓이고 있는 권두섭의 뒷모습을 보며 물었다.
“일을 해야지 어떡하겠냐? 누가 돈을 대 주는 것도 아닌데.”
권두섭은 돌아보지도 않고 하던 일을 계속하며 말했다.
“교회 재밌냐?”
“모르겠어요. 친구 녀석이 나오래서 나가는데...”
“친구 누구? 기형이?”
“네.”
“나는 내 발로 교회 나갔는데... 대학교 입학하고 서울에서 자취하는데 일요일 시간 보내기도 그렇고 그래서 교회를 나갔지. 그리고 더 중요한 건 흐흐흐”
그는 실없는 웃음을 흘리고 말을 이었다.
“점심을 공짜로 먹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교회에 나가게 되었지. 시골 출신 자취생에게 한 끼니 밥은 실로 소중한 것이거든.”
권두섭이 라면을 내왔다. 쟁반에 라면 냄비가 가운데 있고, 그 옆에 김치 그릇 하나, 빈 그릇이 두 개가 놓여 있었다. 그는 주변의 옷가지며 널려 있는 책을 발로 이리저리 밀어 놓고 자리를 마련했다.
“너도 밥 때문이냐? 흐흐흐”
권두섭이 라면을 입에 가득 물고 우물거리며 말했다.
‘나는요. 그녀 때문에 교회에 나가요.’
하마터면 동하는 이 말을 털어놓을 뻔했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건데, 목사도 그렇고, 장로도 그렇고, 또 예수님도 먹고살자고 그러지 않았을까?”
동하는 대답을 하지 않았고, 그도 라면 앞에서 더 이상의 대화를 이으려 하지 않았다.
라면 먹는 후루룩거림은 순식간에 끝이 났다. 그릇을 정리하려고 동하가 일어서려니까 권두섭은 한사코 동하를 말렸다. 손님 대접이라나.
권두섭이 설거지를 하는 동안 동하는 그의 책상에 앉았다. 책상에는 여러 유인물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한 유인물의 제목이 언뜻 눈에 들어왔다.
「예수를 찾아서」
동하는 그 유인물을 집어 건성으로 넘기며 읽어 보았다.
1. 신화적 존재
2. 역사적 실체
3.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모습
4. 바울이 인식한 예수
소제목이 적힌 페이지를 넘기며 글을 훑었다. 주 내용은 역사적 예수를 탐구한 자료를 모아놓은 것이었다.
어느새 설거지를 끝냈는지 권두섭이 동하의 뒤에 와있었다.
“한번 공부하고 싶어서 모아둔 자료야. 기회가 되면 함께 공부해 보자.”
“네, 좋아요.”
동하는 흔쾌히 대답은 했으나, 예수의 실체에 대한 호기심 때문은 아니었다. 인간의 언어는 본심과는 상관없이 사회적 관계 형성을 위해서도 존재한다는 것쯤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 아닌가.
그날의 대화는 거기서 끝이 났고, 시험이 끝나면 만나자는 말을 남기고 동하는 권두섭의 자취방을 나와 언덕길을 내려와 밤거리를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중간고사를 핑계로 나가지 않던 교회를 2주일 만에 다시 나갔다. 교회는 여전히 평온하였다. 그러나 교회 관리자 내부에서는 권두섭의 언행에 대해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듯하였다. 다만 그룹원과 당사자만 모르고 있을 뿐이었다. 권두섭은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를 흘리며 그룹원을 맞아 주었다.
“야, 한 이삼 주에 걸쳐 우리 예수님에 대해 공부해 보자. 과연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궁금하지 않니? 복음서에서조차 각각 다르게 묘사된 예수님의 실체적 모습이 나는 많이 궁금했어. 그래서 이쪽저쪽 자료를 찾아봤거든. 오늘 이 자료는 객관적 기록을 근거로 예수님에 대해 탐구한 자료야. 한 마디로 예수님이 살았을 당시를 기록한 역사서에는 예수님이 언급된 것이 없다는 거야. 그래서 ‘예수는 신화적 존재다’라는 거지. 다음 주에는 예수님의 역사적 실체를 탐구한 자료를 나누어 줄게.”
권두섭은 A4용지 다섯 페이지 분량의 유인물을 그룹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동하도 유인물을 받았다. ‘예수는 신화적 존재인가?’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자취방에 갔을 때 보았던 유인물이다.
필로, 조세프스, 플리니 등 예수가 살았던 시대의 유대인 역사가들의 방대한 저술 속에 예수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을 유인물은 밝히고 있었다. 유인물에 필로에 대해 이렇게 서술하고 있었다.
그는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대략 BC 20년에 태어나 AD 50년에 타계한 것으로 추측되므로 예수님, 그리고 바울과 동시대의 인물이다. 그는 이집트의 부유한 환경에서 살았고, 희생 번제를 드리기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했었다고 스스로 적고 있다. 역사학자로서 그는 방대한 양의 저술을 남겼다. 현재 대략 40여 저술이 보관되어 있는데, 초대 교부들의 인용을 보면 그 외에도 대략 20여 저술이 더 있었다고 사료된다.
그는 그 당시 결코 주류를 이룰 수 없었던 미미한 종교 분파인 ‘떼라퓻’ 또는 ‘에쎄네’ 파에 대해서도 자세히 기록하였는데, 그의 온 저서를 통하여 예수가 언급된 곳은 없다. 그는 생존 시 예루살렘을 방문했다. 만약 예수가 알려진 대로 당시에 세간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면, 필로와 같은 인물이 예수를 간과했을 리가 없다.
이와 같은 내용이었다. 권두섭의 유인물에서 비중 있게 다루어진 또 한 명의 역사가는 조세프스였다. 그는 예수 실존의 근거를 들 때 흔히 인용되는 역사가였다. 권두섭은 그의 저서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예수가 활동했다고 믿어지는 시기의 사회 상황에 관하여 아주 자세한 역사 기록물을 남겨 놓았다.
그의 저서로는 ‘유태인 전쟁’이 있다. 여기서 그는 AD 66-73 년에 일어난 독립 투쟁사를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이 아주 세밀한 것은, 본인 자신이 그 전쟁의 와중에 중요 인물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이 책 중 어디에도 예수에 대한 언급은 없다.
또 다른 그의 저서 ‘유태인 연대기’(Jewish Antiquities), 이 책이 바로 관심의 초점이다. 예수에 관한 구절이 이 책에 실려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아담과 이브로 시작되어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 시대, 출애굽을 망라하며 독립 전쟁 직전(AD 66)까지의 유태인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책 뒷부분에 문제가 되는 구절이 있다.
‘유태인 연대기’ 20번째 책 9장 1절에 나오는, 즉 구세주라 불리는 예수의 형제 제임스(야고보).
또 하나의 구절, ‘유태인 연대기’ 18번째 책 3장 3절에는 이런 부분이 있다.
‘....... 현자였던 예수가 있었다. 그는 많은 유태인과 이방인들을 끌어모았다. 그는 구세주였다. 주요 인물들의 요청에 따라 빌라도가 그를 십자가에 처형했을 때, 그를 사랑했던 이들은 그를 저버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언자들이 미리 부활과 수만 가지 그에 관한 이적들을 예언한 대로, 그는 제3일에 살아나서 그들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에서 유래된 크리스천이라는 집단은 오늘날까지 존속되고 있다.’
성경에 나타나는 예수와 너무나 정확히 부합되는 묘사이다. 이 두 구절로서 예수의 역사적 실존은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역사학자인 조세푸스에 의해 증명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의 대답은 “글쎄요?”이다.
권의 유인물은 이 저술의 변조 가능성을 여러 학자의 견해를 들어 밝혔다. 그리고 이렇게 끝을 맺고 있었다.
조세푸스의 저술에 관한 논쟁은 아직 확실한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이다. 어떤 획기적인 고고학적 발견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논쟁들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논란이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조세푸스에 의한 증거는 불충분한 것임을 지적하고 싶다. 증거로서의 순수성을 상실한 이상 조세푸스의 저술은 더 이상 액면 그대로 채택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뒤를 이어 유인물은 예수를 신화적 존재로 인식하고, 예수 신화의 형성에 대해 서술하고 있었다.
신화설의 주장이 옳다면, 기독교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당시 팽배해 있던 구세주에 대한 기다림, 그 염원을 토양으로 기존의 분파들이 서로 경쟁, 성장하게 되고, 구약에 능통한 바리새인 바울을 비롯한 여러 사도들이 독립적으로 성령의 감화를 받아 영적 그리스도의 구원을 선포한 것이 기독교의 시작이라는 견해가 있다.
당시 그리스도 사상이 유행할 수 있었던 토양은 무엇일까? 한 마디로 사회의 혼란상이었다. 거듭되는 전쟁, 문화와 문화의 충돌에서 오는 가치관의 흔들림을 비집고 기존의 구원자, 중개자 사상들이 히브리 구약 성경의 옷을 입고 나타난 것으로 보는 것이 신화설의 한 견해이다. 예수 탄생 이전에 벌써 많은 구세주들이 여러 문명권에서 나타났었고, 나사렛 예수의 이야기는 이 메시아들의 드라마를 집대성한 것이라는 견해이다.
“이거 역시 하나의 견해일 뿐이야. 다음 시간에는 역사적 예수의 실체에 대해 연구한 학자들의 자료를 한번 보자.”
권두섭은 그룹원들을 돌아보며 이야기했다. 모임을 마치고 그룹원들은 회의실을 나왔다. 그러나 준기는 여전히 자리에 꼼짝 않고 앉아서 유인물을 응시하고 있었다.
동하는 이 유인물의 결론을 권두섭의 자취방에서 이미 읽어 알고 있었다. 기독교가 선포하는 메시지는 역사적 예수의 모습과 관계가 없다는 것이었다. 즉 예수의 실체가 어떠하든 기독교의 메시지는 그것과 상관없이 유효하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