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 부터 모든게 짜릿해
출국 시 델타항공을 이용했는데 나는 프리미엄 셀렉트, 남편은 컴포트플러스 좌석이었다. 프리미엄을 선택한 건 기본 23kg 이민가방을 9만원 추가로 32kg로 업그레이드 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었는데, 붙어 앉아 가는 것보다 하나라도 짐을 더 챙겨 가는게 우선이었던 우리는 비행 시간동안 짧은 이별을 감수하기로 했다. 헌데 꾸역꾸역 32kg 맞춰 싸온 소중한 내 짐을 두고 출국 수속부터 제지가 걸렸다. 프리미엄 32kg는 미국 본사 홈페이지에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을만한 표현으로 오표기 된 정보니 오버차지 비용을 내라는 것.
아니 오표기 된 게 내 잘못인가? 내가 무모하게 32kg 공짜로 실어보겠다고 이 짐을 싸서 끙끙대고 이렇게 왔겠냐고요, 다 안내가 있었으니 이렇게 준비해온거 아니냐고요. 32kg란 표현을 내가 어디서 어떻게 봤는지 요목조목 설명하며 너네가 말하는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을만한 표현' 자체가 항공사 잘못 아니냐고 따졌다. 열 받은 표정은 기본이고 세상 억울하다는 제스쳐까지 투트랙 탑재해 또박또박 반박했다. 직원은 마지못해 본사 홈페이지가 좀 더 나이스한 표현으로 수정되기 전이니 이번만 통과시켜주겠며 말했고 나는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거 아냐? 하며 의기양양 짐을 부쳤다. 이 때까지는 1. 항공사 어이없다. 2. 역시 따져야 들어준다 3. 내 권리를 찾았다는 만족감에 살짝 흐뭇했을 뿐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리고.. 20시간 뒤 바로 현타가 왔다.
아 이 모든 게 한국이었으니, 한국 말이었으니, 세상 잘난 척 따지는 것도 가능했구나.
미국 땅을 밟자마자 따지는 건 고사하고 궁금한 것 하나 제대로 물어보지 못해 답답한 상황이 발생했다. 한 번의 경유를 거쳐 최종 목적지인 지역 공항에 도착했을 땐 이미 밤 열두시가 넘어 있었는데 이 곳은 관광지가 아닌 작은 마을이었기에 이 시간이면 주변엔 지나가도 차도 사람도 없었다.
우버를 불러 미리 계약해둔 집으로 가는 길, 한적한 야간 도로에서 삐오오오옹 경찰차 사이렌이 요란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려니 하던 소리는 점점 우리와 가까워졌고 내 심장도 쫄깃해졌다. 나야? 난가? 여보 우리야? 우리한테 그러는거야? 표적이 된 택시는 길가에 정차했고 우리 셋은 정차한 차에 앉아 침묵했다. 웃긴게 우버 기사도 놀라는 감탄사라든지 경찰이 왜 저러나 싶은 혼잣말이라든지 그런 액션이 정말 암 것도 없었단 거다. 무슨 상황이다 하는 설명까진 안 바라도 통상 뭐 어떤 직관적인 반응이라도 있어야 하는거 아냐? 그 침묵이 더 무서워 나도 꾹 침묵했다. 내가 범죄자 택시를 탄 거 아냐? 이 사람 마약상인가? 불법 총기소지자인가? 영화에서 본 온 갖 나래를 펼치며 긴장하고 있는데 차에서 내린 경찰이 갑자기 나와 남편 얼굴에 랜턴을 쏘았다. 악 눈부셔!
출국 직전 본 영화 <그린 북> 한 장면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백인 주인공 토니가 천재 피아니스트인 셜리의 운전기사로 고용되어 투어 공연을 떠나는데, 밤이면 경찰은 흑인인 셜리가 상석에 앉아 있는 차를 향해 사이렌을 울리고 얼굴에 랜턴을 쏘아대며 흑인은 이 시간에 돌아다닐 수 없다고 소리친다. 나 지금 그런 상황인가? 마음이 쫄리니 별 생각이 다 들었다.
- 왜 이시간에 운전해?
- 나 우버 드라이버야, 이 사람들을 공항에서 태워 가는 길이야
- 오케이, 안전운전
- 바바이
차를 세우고 뒤 미적거린 시간에 비해 상황은 금세 종료됐고 택시가 다시 시동을 걸었다. 평소답지 않게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나를 뒤로 남편이 기사에게 물었다.
- 경찰이 우리 왜 세운거야?
- 너무 늦은 밤이라 누가 타고 있나, 무슨 물건이 있나 한번 확인한거야
맘 속에 궁금이 밀려 들었다. 미국에선 통상 이런 일이 있는 건지, 저 경찰들은 항상 이 근처를 상주하고 있는 건지, 기사는 왜 차를 세운 뒤 경찰에게 먼저 상황을 설명하거나 항변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있었는지. 피곤함과 안도감, 복잡한 심정에 인천공항 델타창구에서 따지던 의기양양 모습은 없고 나는 그저 지친 심신으로 차분히 앉아 있었다. 우버는 다시 조용히 달렸다.
집에 온 남편은 미국에서 혹시 운전하다가 아까처럼 경찰이 차를 세우면 절대 내리지 말라고 일러줬다. 사이렌이 울리면 차를 갓길에 대고, 유리창을 아래로 내리고, 아까 기사처럼 핸들을 두 손에 얹은 채 앉아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내리지 말란 포인트에 힘줘 말했다. 급한 행동 할 것 없이, 불필요한 행동 할 것 없이 침착하게 대처하라며. 아 열받고 억울하고 화나면 흥분하기 전문가인 난데, 따지고 설명해서 원하는 것을 충족해야 만족하는 난데 그러기엔 일단 내 말이 짧고, 이 나라의 규칙은 함부로 대들기 어렵게 엄격하고, 이방인인 나는 더 조심해야겠구나 싶다.
아니, 남편이 그랬잖아. 이 대륙은 지나친 겸손함 보다 자신감이 매력이라고. 앞으로 난 어떤 리듬에서 어떻게 흥을 타야 하는 거냐! 첫 날 도착부터 짜릿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