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주 첫 날
새벽 1시에 도착한 미국집.
열흘 전 남편은 이곳에 먼저 와 입주에 필요한 계약을 마치고 최소한의 세간도구만 남겨둔 채 한국에 돌아 왔었다. 둘이 되어 다시 찾아 온 집. 마을은 깨끗하고 조용했고 하늘에 별이 넘쳤다. 여행 중이면 어떻게든 사진으로 남기려고 전화기를 치켜 들고 애썼을텐데 앞으로 매일 볼 풍경이라 생각하니 카메라보다 눈에 먼저 담는 여유가 생겼다. 택시에서 내린 짐을 잠시 세우고 고개를 꺾었다.
"별 진짜 많아! 오오"
"짐부터 옮기자, 별은 앞으로 매~일 볼거다"
50년 넘은 낡은 나무집에 다그르르륵 이민가방 끄는 소리가 요란했다. 입구 계단에선 이태원 냄새가 훅 코에 들어왔다.
"억 이 냄샌가? 이게 천조국 냄새야?"
"나무 냄새일 걸. 조용히 해, 다 자는 시간이야."
초등학교 때 미국에 처음 와 살았던 남편은 어릴 때 맡았던 미국 냄새가 얼마나 역하게 느껴졌었는지를 여러번 묘사해줬기에 예상하고 있던 일이라 생각보다 편하게 받아 들일 수 있었다. 앞으로 이 느낌 이 냄새를 쭉 의식하고 살아야 한다면 첫인상 첫점수는 최대한 후하게 줘야지.
문을 열자 가구 하나 없이 텅빈 하얀 집 구석에 열흘 전 남편이 입었던 옷들이 카펫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익숙하네, 이제부터 여기가 내 집이군! 실내는 생각보다 깨끗하고 생각보다 너무 컸다. 냉장고와 싱크대, 식기세척기와 오븐, 카펫은 모두 새로 설치해줬다고 했다.
"집이 너무 큰데? 나중에 한국에서 놀러오면 오해하시겠다, 우리 공연히 사치 부린 것만큼 큰 집이네."
이 집을 한국에서 온라인으로 가계약 할 때 우리는 정말 생 난리 난리를 쳤었는데, 그건 다음에 따로 기록해야겠다. 새벽 네시에 한인 부동산의 연락을 받고 초를 다투며 인도인 가족과 계약경쟁을 했었는데, 남편 메일로는 이미 "네가 신청해둔 집은 넘어갔으니, 다른 딜을 봐달라" 는 오피스 메일이 와있었지만 인도인 부부가 어플리케이션만 먼저 접수하고 아직 비용 지불 전이라는 정보를 입수 후, 초스피드로 어플리케이션 작성+계약비용을 먼저 쏘느라 쫄깃한 새벽을 보냈다. 한달 전 비자 준비로 영문 잔고증명서와 소속증명서를 집에 미리 구비해 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신원 증빙과 함께 소액일지라도 먼저 돈 내는게 장땡! 이란 생각에 계약비용을 들이밀었더니 외부계약에 락이 걸리고, 자본주의 캡틴 아메리카 답게 그 날 바로 우리집이 되었다.
특유의 냄새는 각오하고 왔지만 카페트 바닥만큼은 각오만큼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아무리 새거라고 해도 맨 발로 이걸 밟는게 너무 찝찝했다.
"새 카펫이어도 정체불명 바닥 위에 내 소중한 이불을 펼 수는 없어. 오늘은 주방에서 자자!"
유일한 마루인 주방을 물티슈로 닦고 또 닦고 그 위에 이불을 깔았다. 비행기에서 간식도 못먹고 14시간을 내리 잤기에 더이상 잠은 안올 줄 알았는데 웬걸! 시장이 반찬이면 최고의 잠은 피곤이란 말이 맞다. 둘 다 머리를 대자마자 네시간을 다시 기절했고, 밤새 웅웅거리는 냉장고 가동소리가 거슬려 동시에 눈을 떴다.
아침 5시반, 한국은 오후 6시반, 한창 저녁 먹을 시간. 남편은 배고프다며 부스스한 얼굴로 라면을 뜯었다. 부피 큰 냄비는 모조리 선편에 부쳤기에 가진 건 후라이팬 뿐. 팬에 물을 넣어 불을 지피고, 이민가방 윗 단에서 주섬주섬 미역을 꺼내 두조각 부셔 넣자 순하고 뭉근한 맛의 미역라면이 완성됐다.
"뭐야 이거! 너무 맛있엉!"
테이블도 없어 A4용지 박스에 팬을 올리고 아침 6시 부터 둘이 후루룩 라면을 먹다가 웃음이 났다.
"우리 지금 꼴 진짜 웃겨, 주방에 펼쳐놓은 이불에 새벽에 먹는 미역라면이라니!"
라면에 미역 두조각 넣은게 뭐 대단하다고, 그리고 미국 온 지 하루도 안지났구만 뭐 그렇게 음식에 향수가 짙다고, 그런데 진짜 눈물나게 맛있어서 가져온 미역이 앞으로 차차 줄어 들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맘이 조급해졌다.
"다음부터 짐 챙길 땐 옷 열 벌을 빼고 미역과 김을 챙기는게 현명하겠어."
정말이지 옷을 얼마나 많이 챙겨왔는지 짐을 풀면서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월마트만 가도 내가 좋아하는 아메리칸이글 스타일 옷이 엄청나게 많고 엄청나게 저렴하던데. 대체 누구한테 예쁘게 보이려고 이 많은 옷들을 짊어지고 남편과 비행기에서 떨어져 앉기를 불사하며 힘들게 이 곳에 넘어왔단 말인가! 난 그저 가벼운 미역 두조각이면 이렇게 행복해지는데..
누가 그랬다. 웨딩과 해외이사는 인생에서 한 번쯤만 하는 일이라 과소비도 많고 실수도 많을 수 밖에 없다고. 대신 두번 째 부턴 훨씬 더 아끼고 훨씬 더 절약해 잘 하게 된다고. 뭐 모든 일이 다 그렇겠지만 아직 웨딩을 다시 할 생각은 없고 해외이사, 이건 두 번째 때는 정말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일단 옷은 최소한만 챙기고 미역을 챙기자! 아직 정착 초초기라 그런가, 낯선 곳 낯선 냄새 앞에 소중하게 느껴지는 건 익숙한 옷이 아니라 익숙한 먹거리다. 공연한 향수가 일지 않게 옷장 보다 부엌을 잘 써야 겠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이 거 쓰구 이틀 뒤에 방문한 집 근처 K마트에서 짜파게티, 불닦볶음면, 미역, 생된장, 참기름, 들기름, 대파, 쪽파, 다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