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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기리타 Oct 04. 2019

할아버지의 38번째 가족사진

우리 가족은 매년 사진을 찍었다.

우리 할아버지는 기록광이었다. 결혼 1년차 부터 38년동안 매년 가족사진을 찍었다. SNS에서 매해 같은 포즈로 자매사진, 아빠와 딸 사진 등을 찍어 남기는 퍼포먼스를 본 적 있는데 이 이벤트의 원조는 우리 할아버지인 것 같다. 사진이 귀하던 시절, 무려 1949년부터 시작 된 퍼포먼스니까.


첫번째 결혼기념일, 가족사진의 서막(1949.1.9)
하나씩 태어나는 올망졸망 꾸러기같은 자식들. 3년차(1951년) 땐 6.25전쟁중이라 촬영하지 못했다고 한다.
3남1녀 여섯식구의 유년시절.
내가 좋아하는 16년차 사진, 유치원 졸업복을 입은 아빠가 너무 귀여워!


38년 간 빠짐없이 기록 된 할아버지의 가족사진을 보면 세월의 흐름이 온전히 느껴진다. 부부 둘이 나란한 사진을 시작으로 이듬해 팔다리도 못가누는 아기 큰아빠가 등장하고, 큰아빠가 걸을 즘이면 둘째큰아빠가 태어난다. 그도 걸을 즘이 되면 큰아빠는 국민학생이 되고 고모가 태어난다. 큰아빠가 중학교 교복을 입으면 막내인 우리 아빠가 태어난다. 큰아빠가 입던 교복은 둘째큰아빠가 물려입고, 우리 아빠가 교복을 입을 즘이면 큰아빠는 공군복을 입고 있다. 제대 후에는 정장을, 이어 해군을 제대한 둘째큰아빠도 사복을, 우리 아빠는 ROTC 제복을. 시간은 순리대로 그렇게 흘러간다.


어느덧 키가 훌쩍 큰 세아들.

할아버지는 대체 어떻게 매년 자식들을 데리고 사진관을 찾으신걸까. 차례로 입대와 제대를 반복하는 아들 셋을 두고 도대체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 리더십과 실행력이 놀랍기만 하다.


잘자란 4남매의 23년차 사진, 당시 의복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앨범 한 권에서 쑥쑥 크는 자식들의 일대기가 한눈에 보인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점점 중년의 향기가 짙어지고, 아빠의 목이 길어지고 이목구비가 뚜렷해진다. 자식들은 매년 오른쪽 왼쪽, 좌우를 바꿔가며 자리를 잡지만 할아버지는 언제나처럼 할머니의 곁에서 가족의 대들보로 맨 앞에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어느시점부턴가 고모의 모습은 보이질 않는다. 딸을 출가외인으로 여기던 시절 고모의 등장은 결혼 전 까지였나보다.


결혼한 고모는 28번 째 (1975.10.5)를 마지막으로 가족사진에서 빠지게 된다.


그래도 사진은 계속된다. 흑백사진은 기술의 발달로 어느덧 컬러를 덧입고 식구는 계속해서 늘어난다. 고모 대신 하나 둘 등장한 며느리들은 매해 불어나는 아이들을 업고 사진에 동원된다. 정장을 입은 날도 있고 설을 맞아 다 같이 설빔을 맞춰 입은 날도 있다. 졸업 후 취직한 아빠는 현대중공업 잠바를 입고 등장하기도 하고 31번 째(1979.3.10) 가족사진에는 큰사촌오빠가 본격 등장한다. 시간이 흘러 손주는 점점 늘어나고 37번 째(1984.5.6) 가족사진부턴 막내며느리인 우리 엄마도 등장한다. 정말이지 아빠는 한 살부터 결혼하기까지의 모든 성장과정을 다 갖고 있구나!


불어나는 식구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풍족해진다. 어느덧 3대로 넘어가 사촌오빠-사촌언니-우리오빠까지 차례차례 담기기 시작한 걸 보니 알토란 같은 식구들 모습에 가슴도 따뜻해진다.

 

세월이 흐르고 장성한 자식들이 결혼을 하며 며느리가 셋, 손주가 다섯, 식구가 더 늘었다.


이렇게 꾸준히, 빠짐없이, 차곡차곡, 놀랍게도 무려 38년동안 착착 진행 된 할아버지의 이벤트는 1985년 9월 29일 촬영을 마지막으로 가족역사에서 종료된다. 이듬 해인 1986년 7월, 그 해의 촬영을 하기도 전에 할머니께서 너무나 갑작스런 사고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예상치 못한 할머니와의 이별은 온 가족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고 한다. 어느날 갑자기 엄마를 잃은 아빠는, 살면서 다신 겪고싶지 않은 정말 너무 큰 충격이었다고 표현했다. 배우자인 할아버지의 심정 또한 말로는 다 형언 할 수 없을만큼 애통하고 비통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상하게도 38번째 마지막 가족사진은 눈물이 왈칵 날 만큼 유독 모두 더 행복해보인다. 이 날은 특별히 다섯의 어린 손주들이 옷을 맞춰입었다. 사진사가 셔터 누르기 직전 재밌는 말이라도 했는지 할아버지 할머니도 환하게 웃고있다. 유머러스하고 웃음 많은 막내아들 우리 아빠는 목젖이 보일 만큼 제일 크게 빵터진 채 사진에 찍혔다.


가족사진에 찍힌 할머니의 생전 마지막 모습 (1985.9.29) 슬프고 기쁘게도 유독 이 사진에 식구들 표정이 밝다.


그리고 이 앨범엔 나만 없다.

내가 우리집에서 젤 막내라 할머니는 나만 못보고 가셨다. 그래서 1988년 마지막 손주로 내가 태어났을 때 식구들은 할머니 생각을 많이 했다고 한다. 하늘에서 할머니가 주신 새식구 선물이 나일까? 나만 쏙 빠진 할아버지의 앨범을 처음 봤을 땐 그저 속상했다. 나만 없어서 서운했다. 그 땐 이 앨범이 어떤 가치를 가졌는지 어떤 방식의 사랑의 상징인지 알지 못했고 그저 온 식구들 다 등장하는데 나만 없는게 싫었다. 그치만 아이러니하게도 세월이 흘러 두고두고 이 앨범을 계속 떠올리는 것도 나고 가장 많이 찾아보는 것도 나인데, 기록을 좋아하는 할아버지를 막내인 우리 아빠가 닮았고 그런 아빠를 닮은게 막내인 나이기 때문일 것이다.


친정에서 이 앨범을 펼쳐 볼 때면 슬프면서 행복해진다. 비록 나는 등장하지 않지만 이 앨범은 나의 뿌리이자 자존감이고, 가족을 사랑한 할아버지만의 부지런한 리더십의 산물이자 명징한 애정의 증거이며, 내가 사랑하는 우리아빠가 자라고 성장해온 족적이기도 하니까. 한 식구의 흐름을 1년에 한장 씩 남긴 사진으로 추억하다보면 하루에 열장 백장씩 사진을 찍는 오늘 날 '사진이 주는 기록의 가치'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1986년 7월 11일,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가족사진 촬영을 중단한 할아버지는 자식 수 만큼 사진을 추가로 인화해 앨범을 만들어 나눠주었다. 38번째 마지막 가족사진 뒷 장은 할머니의 묘를 안장하는 사진과 국화에 쌓여 있는 할머니 영정사진 뒤로 서럽게 울고 있는 아들 딸 며느리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또 바닥에 앉아 전화를 받거나 식사를 준비하던 생전 할머니의 평소 모습도 앨범 곳곳에 껴있는데 할아버지는 앨범 뒷면에 할머니가 살아오신 일생과 할아버지가 사랑하던 할머니의 장점들을 기록하고, 당신이 기억하는 할머니의 말들을 손수 적어 최종 앨범 완성을 마치셨다.


할아버지가 정리하신 할머니의 일생 기록
工場運營中(공장운영중) 생활은 一人二役(일인이역) [家事(가사)일과 工場(공장)일 助力(조력)]
뛰어난 事理判斷力(사리판단력)과 남다른 손재주 높이 評價(평가)합니다.

그리고 나는, 아랫줄 忌日(기일) : 1986年 7月 11日 日本觀光旅行(일본관광여행)을 가기로 한 夫君(부군)의  回甲(회갑)(1986.10.4)을 85日을 앞두고 한마디 말도 없이 그저 혼자 먼저....... 라는 구절을 보고 울어버렸다. 當該 58歲


할아버지가 기억하는 할머니의 語錄
기억에 생생한 어머니의 말씀

인간의 長點(장점)을 고루 가추신 어머니였다. 아버지가 보신 어머니상

1.사랑(애정)
 1. 어데 아푼데 있으면 다 나한터 주우. 내가 代身(대신) 아풀게.
 2. 잡수구 십푼 것 있으면 무엇이든지 다 사잡수. 當身(당신)이 벌어서 사잡수는데 누가 무어라우.
 3. 工場(공장)에서 석을 녹힐 적에 내 모습을 물그러미 쳐다보다가는 當身 정말 불쌍해 왜 이런 일을 배웠수 딴 사람들은 이런일 안쿠두 잘덜 살드만
 4. 아침에 工場에서 조금 늦게 올라면 "무엇이 그리 할 일이 많애서 좀 빨리빨리 오시유 기다리다 배곱파죽겄수 이게 아침 이유 점심 이유" 어느때는 아침食事(식사)하면 오전 11시쯤 될때도 있으니가

2.子息(자식)사랑
 1. 여보 우리집 애들 다 착해요. 너무집 애들 야기 드러보면 속써기는 애들도 많덥디다. 그리고 며느리 셋 다 착하고 앞으로는 몰라두 무엇이든지 있으면 애들한테 노나주고 십퍼요.

3.遺言(유언) 아닌 遺言
 1. 1986年 봄철 어느날 (즉 가시기 二個月前 이개월전쯤) 새벽잠자리에서 나에게 "여보 만약에 내가 먼저 죽고 當身 혼자 잇게되면 혼자 살라말고 좋은여자, 어더서 살도록 하시요. 옛말에 孝子(효자)아들 며느리가 惡妻(악처)만 못하다는 말이 잇지 안후. 女子는 男子 없이 혼자 살수 있서두 男子는 女子없이 살 수 없으니 내 말대루 하시요.

또 나는 回甲(회갑)을 數個月(수개월)앞두고 日本觀光旅行(일본관광여행)에 대해서 자주 얘기 할적마다 "當身이나 혼자 갔다오우 나는 가지 않을테니!" 나 혼자 무슨 재미로 그런 소리 하지도 말어요 라고 답하였는데 정말 日本旅行(일본여행) 못가게 될 것을 靈感(영감)으로 미리 알고서 한 말이였든가 생각되며 안타깝기 그지없다.

지난, 기억을 살이여서 1988.12.31


할아버지는 영어공부도 열심히 하시고 해외여행도 많이 다니시며 남은 생을 외롭지 않게 보낸 후 평안히 돌아가셨다. 선교사의 도움으로 영어성경을 공부하며 영어예배를 꾸준히 드려 지역신문 한 켠에 <꾸준히 배우는 할아버지> 로 기사가 나기도 했다. 그보다 훨씬 전 내 초등학교 졸업식에는 영어로 편지를 써주고 싶어 몇달 전부터 밤새 스탠드를 켜고 사전을 뒤져가며 작문을 하셨다고 한다. 막상 졸업식 당일에 사정이 생겨 못오게 되자 전화로 "콩그래츌래이션 마이 그랜드도우터 미영! 아임 쏘 프라우드 오브 유!" 를 첫 문장으로 준비해둔 편지를 차근차근 읽어주시기도 했다.


2014년 11월, 할아버지의 부고를 들었을 땐


당시 나는 제주도에서 근무중이었다. 건강이 악화되어 곧 돌아가실 것 처럼 작아진 할아버지를 한달 전 대전에서 뵙고 온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 "저 미영이에요" 했더니 "미영이" 하고 마지막으로 내 이름을 불러주셨다. 그 날 엄마는 할아버지에게 "아범과 저는 아버님처럼 잘 살고 싶어요" 라고 속삭였고 할아버지는 기뻐하셨다고 한다.


제주로 돌아온 며칠 후, 사무실에서 한창 일하고 있을 때 아빠는 내게 "할아버지가 곧 돌아가실 것 같다" 라고 연락했다. 어째야 할 바를 모르는 동안 30분이 흘렀고 문자 한통이 더 왔다.

"할아버지 돌아가셨다."


김포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내내 눈물이 났다. 머리가 큰 이 후로 할아버지 댁에 가도 인사만 드린 후 안방에 들어가 텔레비전만 봤던 내 자신이 후회스러웠고 휴대폰이나 컴퓨터, 전자사전, 디지털카메라같은 신문물 다뤄보기를 좋아하시는 할아버지에게 좀 더 살뜰하게 신지식을 알려드리지 못했다는 자책, 이제는 그럴 기회도 없다는 것에 미약하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도 느껴졌다. 화장터에 들어가 유골함 속에서 한 줌 재로 나오는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보며 훗날 내 부모가 죽을 때 슬픔은 얼마나 더할까에 대한 두려움에 또 눈물이 났다.


아빠는 기록광 할아버지를 좇아 한 살부터 스무 살까지 어린 내 성장과정을 빠짐없이 비디오 캠코더에 담아왔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내가 태어난 후, 두달 치 월급을 부어 산 것이 16mm 소니 캠코더였다. 덕분에 나는 가족앨범엔 등장하지 않지만 손싸개 발싸개에 꽁꽁 묶여 기지개도 못하던 시절부터 초등학교 운동회, 중학교 참관수업, 고등학교 졸업식까지의 모든 비디오 영상을 갖고 있다. 특별한 날이 아니더라도 거실바닥에 엎드려 딸기를 먹으며 엄마와 한글을 익히는 장면이라던가, 오빠의 7살 생일에 온가족이 둘러 앉아 케잌을 자르고 감사 기도를 드리는 모습은 너무 소중한 일상의 기록이다. 아무 이벤트가 없는 날도 아빠는 거실에 삼각대로 캠코더를 설치해놓았고 비디오엔 가족들이 돌아다니며 주고 받는 대화나 전화받는 소리, 먹고 있는 과자의 이름, 당시 TV뉴스 앵커의 목소리까지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찐하게 축하받았던 나의 네 살 생일 기록 (1991.6.29)
슬러쉬 빨대를 거꾸로 꼽아 먹는 것 만으로도 특별했던 어린 날(1992.9.19). 평범한 날의 기록은 시간이 흐르니 무엇으로도 살 수 없는 가족의 재산이 되었다.


120분짜리 테이프 40편에 달하는 16mm 비디오들은 세월이 흘러 테잎끼리 늘어지고 녹아 붙으며 영상이 훼손되기 시작했고 이걸 디지털로 변환하는게 아빠는 은퇴 후 숙원사업이라고 했는데, 과연 아빠는 부지런한 할아버지를 닮아 은퇴하자마자 이 모든 기록을 디지털로 옮긴 후 오빠와 나에게 전달했다. 이렇게 남은 내 기록은 훗날 또 내 자식이 나의 성장과정과 정체성을 알아주는데 멋진 선물이 되길 소망한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와 가족에 대한 진한 사랑을 사진의 기록을 남겼고 아빠는 영상이라는 비슷한 방식으로 내게 시간의 기록을 선물했다. 아직 아이가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록의 포문을 열어준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열정을 곱씹으며 추모하고 이를 다시 기록으로 옮기는 일 같다. 그리고 전해질 수만 있다면 할아버지의 기록은 손주인 나에게 더 없이 소중한 뿌리의 증거이자 너무 큰 선물이라고, 많이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어젯 밤 이걸 쓰고 옮기며 너무 많은 눈물이 났다. 세상을 뜬 뒤 누군가 자신을 기억해준다는 것은 행복하고 좋은 일이니까 할아버지도 하늘에서 기뻐하시리라 믿는다. 얼리어답터이자 시대를 앞서가는 로맨티스트였던 나의 할아버지. 그를 존경하고 추모한다.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던 할머니와 영원한 안식 속에 평안히 잠드시길 바라며..


사랑하는 나의 할아버지, 朴銀出 (1926.9.1 ~ 2014.11.19 作故)
한번도 뵙지 못한 나의 할머니, 金月謙 (1929.9.9 ~ 1986.7.11 作故)
를 막내손녀 美英이 기록하고 추억합니다.
할아버지가 남기신 앨범 『追憶 』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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