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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기리타 Oct 27. 2019

이렇게 아껴서 뭐하나, 샐러드 사먹겠지

빕스에 온 줄 알았어

완전 배부르다 오늘 저녁은 땡!

낮에 냉장고에 남아있던 소고기, 가지, 호박, 토마토를 몽땅 털어넣고 라따뚜이를 해먹었다. TV 보며 식탁에 오래 앉아 있었기 때문에 5인용 팟을 꽉꽉 채워낸 요리였다만 두시간 남짓 사이에 다 먹어버렸다. 식후땡으로 커피와 아이스크림, 레모네이드까지 즐겼으니 오늘 점심은 완전 과식한 셈. 저녁 일곱시가 넘어도 배가 안꺼져 나는 외출을 제안했다. "크리스마스트리 샵 가자!"


집 근처에 큰 인테리어 몰이 있다. 다음 주면 할로윈도 끝이라 겨울 소품이 새로 많이 나왔을 듯 해 산책 겸 구경이나 해야지 싶었다. 집에 올 때 재활용 센터에 들러 그동안 모아둔 빈 페트병과 맥주캔도 쿠폰으로 바꿔 올 심산이었다.


그냥 크리스마스트리 샵으로 곧장 갔으면 되는데, 그랬음 되는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홀푸드마켓' 간판이 크고 영롱해 보였을까? 이 동네 웬만한 마트는 다 돌파했는데 딱 하나 안가본 곳이 홀푸드마켓이다. 평소처럼 지나쳤으면 됐건만 오늘은 이상하게 꼭 한번 구경 해보고 싶었다. 트리 사러 가자는 남편 소매를 홀푸드마켓 방향으로 잡아 끌었다.  "나 저기 한번 가볼래"


사실 마켓이 다 거기서 거기지. 뻔하지. 트레이더조, 샘스, 마켓32, BJ마켓이나 다를 바 없는 그냥 슈퍼였다. 좀 크고 좀 더 깨끗하고 좀 더 젊고 활기찬 정도? 내부 인테리어가 꽤 좋았고 아마존 프라임 회원은 추가 할인되는 품목이 있어 가끔씩 올만하겠네 싶었다. 뭐는 어디보다 싸고 뭐는 더 비싸네~ 미국 마트 다 파악한 척, 가볍게 분석 후 나가려는데 급 맛있는 냄새가 발길을 잡는다. 한 쪽 귀퉁이에 싱싱한 풀과 과일이 가지런히 정리 된 뷔페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종이박스에 음식을 담고 있었다.


"이거 뷔페인가봐!"


화려한 컬러의 샐러드코너를 보는 순간 점심에 먹은 라따뚜이는 순식간에 소화 되고 구미가 당겼다. 우리 이거 조금 먹고갈까? 다시 한번 남편 소매를 잡아 끌었다. 대식가인 남편도 그냥 지나칠 리 없다. 그럼 조금 맛보고 갈까? 순식간에 사인을 주고 받은 우리는 종이박스 하나씩 챙겨 들었다. 좋아 렛츠파뤼타임!


"근데 이거 계산을 어떻게 하는거지?"

"박스 한 개당 8.99불이래! 엄청 싸당. 마트에서 먹는 거라 그런가봐!"


이렇게 빛깔 좋은 야채와 과일이 9달러라니 핵이득! 딱히 배가 고프진 않지만 뷔페 찬스를 놓칠 순 없지. 나는 욕심 껏 음식을 눌러담기 시작했다. 흘깃 옆을 보니 예쁜 백인이 한 눈에 봐도 탐스러운 누들을 코딱지만큼만 담길래 잠시 의아하긴 했다. 다이어트를 하나?


"사람들은 왜 이렇게 음식을 조금씩 담아? 시간이 늦어서 그런가봐."

"그게 아니고 이거 무게 당 단가인 것 같은데? 아내 가격표 제대로 봤어?"

"당연하지! 박스 하나에 8.99불이라니까!"


최근 남편은 마트나 상점에서 모든 걸 내가 소통하고 내가 계산하고 처리하도록 전권 위임했다. 영어 한마디라도 더 쓰라고. 박스 단위 가격이 맞다는 확신에 찬 대답에 그는 더이상 묻지 않고 음식을 담았다. 슬쩍 보니 고기완자에 생선가스, 치킨샐러드까지 산더미였다. 저녁 안먹겠다던 사람 맞아? 질 수 없지. 버섯과 아스파라거스, 렌틸콩과 비트샐러드, 콘옥수수로 탑을 쌓았다. 우리가 이 난리인데 주변에선 정말 소량의 음식만 담고 있었다. 뭐 선진국 시민의 여유인가 싶었지 뭐어. 그리고 계산대에서 놀라 자빠질 뻔 했다. 눈 앞에 찍힌 숫자. 46.5불. 46.5불? 정말? 레알? 왜이렇게 많이 나왔죠? 기절초풍 직전인데 점원이 친절하게 답한다.


"무게 당 가격입니다~"


잠시 화장실 다녀오겠다며 튈 수도 없고, 이제와서 종이박스에 엉망진창으로 담아온 음식을 반납 할 수도 없다. 남편은 내가 너 땜에 못산다 하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며 값을 치뤘다. 분명히 박스당 8.99불이었는데 뭘 잘못 본거지? 되짚어 보는 순간 머리가 싸하다.


아 또 그놈의 파운드!


마트에서 과일 살 때 마다 날 헷갈리게 하던 그놈의 파운드! 오늘도 저 놈에게 속았구나. $8.99/lb 의 lb(파운드)를 1box로 본 건 상상력 과한 무지랭이 내 탓이구나. 오늘도 내가 한 건 했구나! 난 그저 처음 음식에 현혹 된 순간부터 박스 당 8.99불이라고 믿고 싶었나보다.


헛헛한 얼굴로 마켓 구석 테이블에 앉아 담아온 음식박스를 열었다. 남편은 2.4lb(1.1kg), 나는 2.36lb(1.0kg) 도합 샐러드 2.1키로가 우리 앞에 있었다. 간이 식당인 만큼 테이블은 좁았고 의자는 차가웠으며 플라스틱 식기는 작고 조악했다. 내구성에 비해 너무 가득 담은 음식 탓에 종이박스 바닥은 양념에 젖어 너덜거리고 있었다.


"이런 날도 있는 거지 뭐... 얼른 먹자"


저녁 먹을 생각도 없었던 우리는, 배도 별로 안고팠던 우리는, 차가운 가을 밤, 차가운 의자에 앉아, 5만원 어치 샐러드를 먹기 시작했다. 차가웠다. 으으 면도 야채도 과일도 너무 차가웠다. 이 돈이면 한인식당에서 낙곱새를 먹었지. 그럼 김치랑 단무지도 리필해가면서 먹었겠지. 제대로 된 식기에 따뜻한 국물 챙겨 마시며 제대로 된 외식을 했겠지. 아님 중국식당에서 마라탕이라도 먹었겠지. 이 밤에 돼지고기 세 근을 넘는 샐러드는 다 무어냔 말이다! 무슨 이런 곳에서 이런 외식을!


얼 빠진 표정으로 꾸역꾸역 샐러드를 비웠다. 점심에도 채소 몇 통은 먹은지라 세 숟갈 뜨자 배가 불렀다. 음식은 한가득 남았는데... 남편도 몇 입 먹다가 식욕이 떨어진 표정이었다. 나는 빕스 같은 건 줄 알았어... 소심하게 중얼거리며 기계적으로 스푼을 떴다. 맛을 느끼는 둥 마는 둥 풀과 과일, 약간의 고기를 씹고 음식 뚜껑을 닫으니 8시 23분. 영수증에 찍힌 계산 시간 8시 8분. 정확히 15분 동안 즐긴 46불어치의 샐러드 대환장 파티였다.


뒤늦게 '홀푸드마켓' 에 대해 이것저것 검색을 해보는데, 유기농만 취급하는 고급 식료품 마켓이란다.  착한 푸드를 지향하는 이 곳에선 유전자 변형 식품도, 건강을 해치는 음식도 취급하지 않아 코카콜라도 팔지 않는단다. 정말 고급진 마트셨구나 홀푸드마켓께서는...


집에 오는 길,  재활용센터에 들러 트렁크 한 가득 담긴 페트병과 빈 맥주 캔을 쿠폰으로 바꿨다. 3.5불 마트 쿠폰이 우리 손에 들어왔다. 배불러죽겠다는 내 타령 뒤로 남편이 나직하게 읊조린다.


"이렇게 아껴서 뭐하나, 샐러드 사먹겠지"


lb는 파운드를 뜻하지 1box가 아닙니다 으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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