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먹는 회, 나를 위한 회
회 먹고 싶다. 꿈에도 아른거린다. 초고추장에 푸욱 찍어 먹는 아주 쫀득한 활어회. 손바닥에 펼친 깻잎 위에 생마늘 한 알 얹고, 잘게 썬 땡초 반 알 넣고 초장 쌈장 간장 번걸아 담궜다가 입에 뙇. 파릇한 생깻잎과 싸리한 마늘향이 섞여 어금니 한까득 팔딱팔딱 몰캉몰캉하게 씹히는 두툼한 뭉칫덩이를 입 안 가득 얌냠. 꾸울딱 한 입 삼키고 나면 소주 반 잔 쭈욱 들이켜 다시 목을 부드럽게 풀어주고, 묵은지나 생양파 따위 새큼하고 아삭한 밑반찬 한 점 더해 입 속 정갈히 소독 후 두 번째 젓가락 출동!
손바닥 위에 다시 깻잎 펼쳐 회 올리고 마늘 집고 고추 집고 여기에 톳이나 가시리 있으면 더 땡큐고. 아.. 침 고인다.
뭉근하고 부드러운 식감은 미국에도 널린지라 숙성회보단 찰지게 팔딱이는 감칠 맛의 활어! 활어회가 먹고 싶다. 회사 앞엔 광어 우럭 활어회 판매점이 널려 있었는데... 대한민국 어딜가나 날 것 파는 곳은 널려있지. 이 동네엔 그런게 없다. 횟집이 없어. 미국인들이여, 그대들은 정녕 회맛을 모르시옵니까? 참기름 솔솔 노른자 탁 터뜨려 먹는 육회.. 까지는 네 바라지도 않고요. 그냥 당신들이 많이 먹는 생선이요. 물고기요. 피쉬요. 날로는 왜 안먹어요? 왜요 왜!
뭐 그래, 여기도 횟집 있다면 있다. 많다. <Japanes Sushi> 일본식 스시 초밥집. 근데 간판부터 맘에 안든다. 하아나도 안 땡긴다. 장난감 가게 같다. 회가 너무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럽고 세상 달큰하게 생겼어... 뭐 잘났다고 일장기는 그리 크게도 여기저기 걸어 뒀는지, 해외에서 꿈틀대는 난데없는 애국심의 발로인지, 회 먹고 싶어서 요동치는 이 마음에 스시집 문을 두드리고 싶진 않다. 요리사가 주방에서 공 들여 조물락거린 아기자기하고 정갈한 회 말구. 예쁘고 달큰한 스시 그런거 말구. 작은 접시에 터질 듯 쌓아 올린, 두툼하게 막 썰어재낀 막회! 막회가 먹고 싶다. 그래 막회. 나 증말 막회가 먹고 싶다!
회가 먹고 싶을 줄 알았지. 그리울 줄 알았지. 각오하고 있었지. 그래서 출국 전 참 부지런히도 먹었다. 친구들 만나 먹고 회사 동료들과 먹고 아빠랑도 먹고 미국 오기 전 열심히 먹었지.
남편은 회에 별 흥미가 없다. '붉은고기파' 그에게 '회는 있으면 먹는 음식' 일 뿐 찾아 먹는 메뉴는 아닌지라 특별한 날, 저녁 안주로 회를 정할라치면 난 꽤 요란한 애교를 선보여야 했다. 아침부터 숟가락을 들고 노래했다. 오늘 밤 주인공은 회야 회~! 양반같고 선비같은 그는 날 것 자주 먹으면 몸에 안좋다며 잔소리를 했다.
그러고 보면 미국 오기 전 마지막 회도 혼자 먹었다.
출국 며칠 전, 선편에 이삿짐 몽땅 부치고 텅 빈집에서 할 수 있는 건 잠자는 것 뿐이던 날, 퇴근 두 시간 앞두고 그 날 따라 유독 몹시 매우 회가 땡겼다. 긴급히 사방에 번개를 쳤는데 인생을 잘못 살았는지 여섯 번 친 번개에 여섯 번 거절 당했다. 남편도 선약으로 늦게 온단다. 헛살았구나! 거절당한 여섯 번의 번개를 곱씹고 인간관계에 실수가 있나 되짚으며 집에 오는 길, 이 놈의 회 혼자라도 먹어야겠다 싶어 동네 포장횟집 세 곳을 찾았는데 그 날은 정말 억세게 운 나쁜 날이었다. 셋 중 한 집은 사장님이 병가고, 한 집은 정기휴일이고, 한 집은 사유도 써있지 않은 특별(긴급)휴일 이었다.
그 날 첨으로 <배달의 민족> 앱을 깔았다. 판교-정자-서현 근방 배달 횟집 메뉴판을 탐독하며 발가락 짜릿하게 혼자 뭐 먹지 고민했다. 배달앱 첫주문이라 다소 소심하게 모듬회 (소)자 하나를 주문했고, 생일에 친구가 카톡 선물하기로 보내준 문배주 한 병도 뜯었다. 이른 이사로 짐이 빠져나간 집엔 식탁도 없어 마룻바닥에 회를 펼쳤다. 술을 뜯고 얼음 잔을 채우고 그렇게 혼자 바닥에 퍼질러 앉아 회를 먹었다.
"이 맛이양!"
고대하던 날 것의 맛! 전생에 난 좀 야만적인 사람이었을까. 생 살이 왜이렇게 맛있을까. 배달 온 차갑고 몰캉 쫄깃한 회에 새콤한 장과 마늘을 더하니 그제서야 몸도 맘도 배도 좀 만족스럽고 흐뭇해진다. 맛있엉! 한 입 한 입 아껴 다 먹고 눈 감길 즘 남편이 왔다. 술독을 흔들어 보더니 왜 혼자 먹었냐며 아쉬워 한다. 회보단 빈 술병이 씁쓸한 얼굴. 그 반응에 괜시리 통쾌함을 느끼며 젓가락 놓고 스르르 잠 들었던 기억.
그게 한국에서 먹은 올 해 마지막 회다. 출국 전에 한번 더 못 먹을 줄 알았음 남길 지 언정 대(大)자를 시켰어야 했는데...
2016년 결혼식 일주일 전 남편의 생일, 그의 집에 초대를 받았다. 낯설고 어색한 맘으로 방문한 예비 시댁 주방엔 생일상이 한가득. 이렇게 사랑 듬뿍 받는 남자였어? 감탄하는 와중에 식탁을 보니 메인메뉴가 글쎄! 회다. 예상치도 못했다. 회라니! 회! 아이 러브 회!
친정식구들은 회를 참 즐겨 먹었다. 수원에 살 때도 그랬고 종종 부산 외갓댁에 모이면 밀치에 열기회는 저녁 기본 메뉴였다. 내가 무척 좋아하던 것 중 하나가 아나고에 콩가루를 뿌린 것인데 경상도에선 이게 진정 별미다. 채썬 양배추 위에 아나고 회를 올리고 초고추장을 듬뿍 뿌려 땡초에 다진 마늘을 섞고 고슬고슬 지은 고두밥 퍼먹듯이 숟가락으로 회를 떠먹으면 새콤달콤 고소함이 한 입 가득 퍼진다. 아나고 뿐이랴! 전어와 과메기도 철마다 돌아오는 익숙한 친정집 밥상 서브메뉴다.
헌데 남편은 살면서 씨푸드 뷔페가 아니고서야 가족과 횟집 가본 적이 한 번도 없단다. 외식 메뉴가 회였던 적은 전혀 없고, 집에 회를 사와서 먹은 적도 세 손가락에 꼽는단다. 먹겠다고 먼저 찾는 사람이 없다는데 그 날 예비 시댁에서 맞은 남편 생일상 메뉴가 '회' 였던 건 분명 나 때문이다. 혼자 살며 동분서주 결혼준비 하느라 분투 중인 나에 대한 시부모님의 배려고 애정이었다. 그 날 아버님은 서울에서 인천을 왕복하며 싱싱한 회와 홍어애를 직접 공수해오셨다고 한다. 식탁 가득 예쁘게 차려진 회 한상을 보며 정말 깜짝 놀랐다. 다같이 모여 남편의 생일을 축하하는데 내 맘은 또 요란스럽게 벅차오르고 있었다. 이건 내 생일이구나! 회로 수놓인 테이블 앞에 나는 울 뻔 했다. 감사하고 좋아서, 기뻐서 또 너어무 맛있겠어서!
갑자기 회 먹고 싶다고 난리부르스 오바인 이 마음의 이유는 둘 쯤 되는 것 같다. 하나는 먹고 싶으면 일단 번개부터 치고 볼 동료들이 지척에 있었던 날에 대한 그리움. 비록 육전육패 거절 당했을 지라도? 흐흣 아무도 같이 안 먹어줘도 배달앱 하나면 집까지 딩동! 배달 되는 한국의 요란뻑쩍한 시스템도 생각나고, 마음 맞는 날은 새벽까지 회에 술잔 기울이며 수다 떨 수 있었던 날에 대한 향수가 회에 대한 첫번 째 그리움을 만들어 낸다.
두번 째는 나를 위해주는 사람들과 함께 한 예쁜 식탁에 대한 그리움. 싱싱한 회가 상다리 부러지게 풍년이던 그 날 시댁의 식탁. 회를 매개로 "너를 환영 한다" 전해 받은 11월의 따뜻한 마음. 누군가 내 생각하며 차려준 식탁, 누군가와 함께 차리던 식탁, 누군가와 함께 거들고 함께 먹던 식탁에 대한 향수가 회를 향한 두번 째 그리움을 만들어 낸다.
질퍼억하고 무드 좋은 미국 생활 중 생동감 넘치게 팔딱이던 한국 특유의 요란함이 그립나보다. 여기선 모든 걸 부부가 오롯이 둘만의 힘으로 개척하게 되는데 믿음과 전우애가 굳세어지는 만큼 매사 신중해지고 생각도 깊어진다. 그러다보니 '왁자지껄함' 딱 한 스푼이 부족하다. 지금 이 순간, 소란 반 스푼요란 반 스푼이면 좀 더 팔딱이는 활어회가 되어 더 생동감 넘치는, 더 리듬감 쫀득한 하루가 될 것 같은데... 생일축하 노래가 흐르고 회를 안주 삼아 반갑게 떠들던 지난 밤들의 온정이 그립다.
늦가을 향수는 갑작스런 회 타령으로 이어져 온종일 차고 희고 팔딱이는 새콤한 활어회 맛을 떠오르게 한다. 뉴저지나 맨해튼 가면 판다던데 과연 그 맛이 기대만큼 흡족한 수준일까? 이게 회를 먹어야만 해소가 되는 건 지, 이웃사람 싹 모여 파티라도 한 번 해야 속이 시원 할런 지 모르겠다. 11월 초에 급작스럽게 찾아온 회 귀신이라니, 내년에 한국 가면 아묻따 식구들과 회부터 찾아 먹어얄 듯 싶다. 별다른 고민 없이 헤아림 없이 그냥 제~일 큰 사이즈로! 아주 싱싱 펄떡 활딱이는 활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