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해피엔드』(2024) 리뷰
영화 도입부에 점멸하는 빨간 불빛들, 눈부신 오후의 빛 아래 폭력적으로 진압당하는 평화시위, <정상성>이 득세하는 아침과 낮의 학교, 빛이 비치는 곳에서라면 어디서든 벌점을 가하는 파놉티—그에 저항하는 밤의 생물: 수위의 랜턴 빛을 피해 어두운 학교로 숨어드는 음악연구동아리 학생들, 불편하고 필사적인 밤샘 점거 농성, 외국인이 주 이용층인 폐허의 클럽…. 그들의 희미한 빛이 얼마나 생생한지는 밤에만 알아볼 수 있다.
코우가 어머니와 시장가에서 싸우던 밤, 우연히 마주친 순찰단의 랜턴은 왜 그리 눈부셨을까. 빛과 어둠 중 보통 보이지 않는 쪽은 어둠이지만, 코우와 어머니에게는 순간 그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눈부셨다. 이 장면에 두 가지 비극적인 역사가 떠오른다. (1) 6.25. 전쟁 당시 밤중에 들이닥쳐 눈부신 빛을 비추고 군복을 알아보지 못하게 한 뒤, 남과 북 중 어느 쪽을 지지하는지 물어보고 다르면 죽이던 군인들 (2) 관동대지진 당시 자경단을 꾸려 조선인으로 의심되는 민간인을 학살한 평범한 사람들. 더할나위없이 친절한 그들 중, 코우네 가게에 혐한 문구를 남긴 인물이 없다고 어떻게 단언하겠는가? 선의를 가장한 감시와 폭력을 예감하게 하는 장치였다.
유타와 코우의 갈림길인 육교는 언제나 해질녘이다. 빛과 어둠 사이, 도로 차선의 한복판. 각자의 방향으로 걸어가며 둘에서 하나가 되는 경계. 그러나 왼쪽 오른쪽은 다를지언정 아래로 내려가는 것은 같다. 빛이 덜한 곳, 해가 내려간 방향으로 걸어가는 두 사람이 언젠가 다시 만나는 건 필연적인 일이다.
관객은 코우가 유타와 '다르다'는 것을 극초반부터 알 수 있지만, 유타는 코우가 자신과 '똑같다'는 사실에 추호의 의심도 없어 보인다. 그 점이 유타의 어린아이다움을 가장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유타는 그저 노는 게 젤 좋아 친구들 모여라인 뽀로로였을 뿐...) 그러나 어린아이는 순수한 동시에 잔혹하다.
유타에게는 '함께'가 가장 중요하다. 톰이 귀국하며 영원한 '함께'가 없다는 사실을 체감하고, 코우와의 차이가 '함께'를 불가능하도록 만들자 그제서야 진정한 차이점을 직시하게 된다.
물론 유타와 코우가 멀어진 원인으로는 코우가 유타와 함께 기기를 옮기다 경찰에게 임의동행을 요청받는다거나, 후미를 따라 모임에 가느라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게 된 게 직접적이다. 그러나 균열은 이 모든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존재했다. 영화 초반 카페 안에 있던 코우는, 바깥에서 극우 시위를 보호하는 경찰에게 항의하는 후미를 인상 깊게 보고 있었다. 한국 음식점을 운영하는 어머니 밑에서 자라, 월드컵이면 붉은악마 옷을 입은 재일한국인들이 모이는 한인커뮤니티의 중심에서 자란 코우에게는 늦든 빠르든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극 중후반까지 관객은 유타를 철부지라고 생각한다. 미워할 수 없지만 답답해하기도 한다. 많은 사람이 굳이 따지자면 코우 쪽에 이입했을 것이다. 그런 우리에게 감독은 강당신으로 묻는다. "용기라는 게 뭔데?"
유타를 연기한 배우 구리하라 하야토는 강당 장면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유타는 코우에게 무언의 선언을 전한다. 이게 바로 내 결정이야, 하고. 그리고 조금 길게 바라보며 또 무언으로 물었을 것이다. 네 결정은 무엇이니? 그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코우에게서 유타는 아마도 작은 서운함을 느꼈을 거라 생각했다. 물론 유타의 결정과 코우의 결정은 엄연히 다르고, 유타는 자신의 선택만으로 충분하지만 오랜 친구로서 잠시 동요할 수 있을 거라 상상했다. 그 서운함을 감추기 위해 살짝 웃는다.
코우가 가지게 된 신념이 대학 추천서와 퇴학위기 앞에서 어그러지는 것, 그때 행동할 수 있었던 유타의 동력. 유타의 삶에 강당 위에서 느낀 떨림, 코우와의 눈맞춤, 서운함은 오래 남을 것 같다. 그만큼이나 오래 남을 것은, '내가 그 때 행동했다.', '내가 그 애를 지켰다'라는 감각. 사람은 그런 것으로 살아가기도 한다.
겠냐?
이 영화의 그린 듯한 청춘 서사는 체제 안에서만 지속 가능하다. 교장실 점거에서 승리한 후미가 대문을 나서며 '그래봤자 결국 교장의 용인으로 결론난 사태'라며 석연치 않다는 불만을 토로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교장은 "너희가 학교 안에 있어서 이 정도로 넘어가는 거지, 사회에 나가면..." 식의 훈화를 한다. 학교 안의 최종빌런은 교장이지만, 학교 밖의 최종빌런은 누구인가? 그건 혐오세력도 심지어는 극우 총리도 아니다. 형체 없는 악이 뉴스 구름처럼 머리 위를 떠도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진짜 세상에는 절대악이 없다. 병리적 구조만 있다. 교장이 감시시스템 파놉티 도입 철회를 발표했을 때, 일부 학생은 "나는 파놉티가 생겨서 좋았다"며 파놉티 철거파에 반발했다. 반사적으로 "무슨 소리야!?"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민주주의란 그런 것이다. 참으로 피로하지 않을 수 없다.
뭐가 '진짜로' 옳은지 정해주는 건 독재다. 민주주의 안에서는 개인이 휘둘리고, 반목하고, 방황한다. '진짜로' 그른 것이 있다 해도 그것이 누군가의 의견이라면 덮어놓고 배제할 수 없다. 민주주의라는 이름 아래, 혐오와 폭력조차 의견이라는 명목으로 정당화되는 세상. 그 세상에서 그나마 할 수 있는 건, 소수자를 보호하기 위한 제도를 만드는 일이다. (그 첫 발걸음이 차별금지법 제정이라고 믿는다.)
2010년대 일본의 헤이트스피치를 실시간으로 전해들으며 겪었던 분노와 무력감이, 2025년 현재 한국에서 자행되는 혐중 시위를 보며 되풀이되었다. 해피엔드 안에서는 <학교>라는 예비사회적 공간에 이야기를 국한시킴으로써 절제되었던, 참담한 감각이다.
『해피엔드』안에서 여러 사건이 해결된 것 같지만, 사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재해 위험 앞에 총리는 굳건하게 집권하고, 혐오세력이 날로 목소리를 키우며, 학교 밖 감시 시스템도 여전히 공고하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슬플 정도로 현실적이다. 엔딩 장면은 '시절인연'이라는 불교 용어를 영상으로 풀어놓은 듯 아름답고 먹먹하지만, 그에 비례해 영화관을 나오는 길의 우울감도 극대화됐다.
그러나 절망하기엔 이르다. 슬퍼하는 건 괜찮다. 그건 동력이 되니까.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세계에서 무력감을 넘어서기 위한 동력. 다음 변화를 위해 일어서기 위한 동력. 그들 한명한명의 경험은 풀뿌리처럼 이 사회에 싹틀 것이다. 영화가 속시원하게 제시하지 않은 해답은, 바로 거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