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을린 사랑>: 사랑과 증오는 함께할 수 있는가

레바논 내전의 역사적 맥락과 더불어

by 이음미응

1. 역사적 맥락: 레바논 내전


2025년 4월 13일, 레바논은 내전 발발 50주년을 맞았다. 1975년부터 진행된 15년간의 내전은 1990년 막을 내리는 듯 했으나 21세기에 들어서도 이스라엘-헤즈볼라 충돌, 베이루트 사태 등 크고 작은 인명피해와 갈등, 의심이 계속되며 군사적 긴장이 지속되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레바논이라는 신생국의 탄생 및 현 정치체제에 대해 알고 싶은 분들은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가 쓴 <종파 정체성이 저지른 레바논 100년 내전> 일독을 권한다.

543~meta-image.jpg Photo Credit: Dar Al Mussawir - Ramzi Haidar

영화의 배경은 크게 캐나다 퀘백(현재)과 레바논(과거)으로 나뉜다. 영화상으로 레바논의 실제 지명이나 단체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나왈이 휘말린 거시적 흐름을 이해하려면 간단하게나마 레바논의 정치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레바논은 여러 종파가 정치적 세력을 이루는 국가다. 이를 콘페셔널리즘(confessionalism)이라고 하는데, 단순히 설명하면 '신앙에 따라 정치세력이 분배되는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아주 생소한 제도지만, 실제로 헌법 및 타이프 협정에 의해 기독교-무슬림 및 인구 비율에 따라 의석 수가 나뉨)


내전 직후 레바논 내 종파 세력은 아래와 같았다.

An approximation of the distribution of Lebanon's main religious groups, 1991.

(무슬림)시아파-수니파-(기독교)마론파-드루즈 + 기타 기독교로 구성되어 있다. 건국 당시에는 기독교가 거의 51%였는데, 중동전쟁으로 인해 팔레스타인 난민이 레바논으로 유입되면서 수니파 비중이 커지고, 정치적 세력 균형이 흔들리며 기독교 민병대(우파, 친서방, 레바논 민족주의)와 무슬림(좌파, 친소련, 아랍 민족주의) 간의 갈등이 고조되었다.


바로 이런 상황에 나왈이 와합(난민)과 사랑해 니하드를 낳은 것이다. (1970년 5월) 나왈이 쌍둥이를 낳고 출소한 시기는 내전이 마무리되는 타이프 협정(1990) 전후로 추정된다. 물론 드니 빌뇌브 감독은 '레바논 내전'그 자체나 특정 세력만을 비판하기 위해 영화를 제작한 것이 아니므로, 이 모든 사실관계를 알지 못해도 영화를 이해할 수는 있다.



2. 1 더하기 1은 어떻게 1이 되었나


들어가기에 앞서, 한국 웹 리뷰를 보니 혼동하는 분들이 종종 있어 사실관계를 달아둔다.

▪ 무슬림(샴세딘) 측이 고아원 폭파 후 니하드 포함 아이들을 무슬림 병사로 키움
▪ 나왈은 기독교 민병대의 버스 학살 및 데레사 캠프 참상 목격 후 샴세딘에 합류
▪ 니하드는 샴세딘의 저격수로 이름을 날리다가, 기독교 민병대에 생포되어 크파르 리얏에 고문기술자로 보내짐

영화에서 공증인이 "고아원 폭파가 누구 짓인지 알아야" 아이들의 행적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 이유도 여기 있다. 굳이 짚고 넘어가는 이유는, 이 복잡한 장치에 나왈과 아이들이 내전의 진영 논리에 이중 삼중으로 휘둘리는 구조가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내의 샤르벨 삼촌 집에서 학교에 다니던 나왈은, 내전이 발발하자 혼자 남부로 향한다. 아이를 찾기 위해서다. 여정 내내 모두가 남부에서 빠져나갈 뿐, 그녀와 같은 방향으로 가는 사람은 없다. 나왈의 목에는 십자가 목걸이가 걸려 있고, 머리에는 히잡이 둘려 있다. 고작 작은 표식일 뿐인 물건들이 위기의 순간 그녀의 목숨을 구한다. 남북-좌우-국적이라는 하나의 정체성만으로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논리는 이토록 얄팍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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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 탑승해 모녀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내던 나왈은, 곧 죽을 운명에 처한 어머니에게서 딸을 빼앗아 살리려 하지만 아이는 눈앞에서 총에 맞아 죽는다. 나왈에게 있어 그 아이는 자신이 구하지 못한 니하드이자, 5년 전 눈앞에서 총에 맞아 죽은 연인 와합이었다. 엄청난 정신적 충격 속에서 아이가 데려가졌다는 데레사로 향하지만, 이미 학살이 끝난 데레사 캠프의 잔해 속에서 수많은 시체와 조우할 뿐이다. 기독교 민병대에 의해 니하드가 죽었다고 생각하게 된 나왈은 복수를 위해 샴세딘에 합류하고, 기독교 민병대 지도자 아들의 가정교사로 가장해 적진에 숨어든다. 결국 암살을 성공하고 크파르 리얏에 수감된 나왈은, 비인도적인 상황에서도 노래를 멈추지 않으며 저항한다. 그곳에서 태어난 것은 오이디푸스보다 더한 비극이었다.



3. 사랑과 증오가 함께일 수 있는가


기독교 집안에서 무슬림 난민과 정을 통한 수치, 무력의 프레임을 거부하는 평화주의 기자, 어긋난 복수심의 암살자, 저항의 대가로 폭력에 시달리는 여성, 과거를 침묵하는 이민자, 이해할 수 없는 어머니... 나왈 마르완은 번번히 그렇게 경계인이다. 하다못해 수영장에 자리 난 의자에도 앉지 않고 굳이 구석에 짐을 두는 사람이다.


수영장은 언젠가 잔느와 시몽(자난과 사르완)이 던져질 뻔 했던 흐르는 강이자, 나왈을 더 낮은 곳에 서게 함으로써 니하드의 발목을 보게 했던 매개체이다. 물속에서는 모든 것이 뒤섞이고 가라앉는다. 진실은 곧 침묵이다. 잔느와 시몽이 떠난 여정은 겨우 가라앉은 진실, 곧 사랑과 증오를 다시 표면으로 떠오르게 하는 일이었다.


왜 나왈은 잔느와 시몽에게 그 일을 직접 이야기하지 않았나? 혹은 영원히 침묵하지 않았나?

나왈이 1+1=1사람을 향한 편지를 '2통' 남긴 것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나왈은 아부 타렉을 용서하지 않았다.
동시에 나왈은 니하드를 사랑한다.


나는 이 영화가 용서에 대한 영화라는 평에 동의하지 않는다. 사죄도 구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용서한단 말인가? 나왈이 아부 타렉과 니하드를 한 사람으로서 용서했다면, 이런 편지를 보내지도 않지 않았겠지. 니하드는 캐나다에서도 새 이름을 짓지 않고 '니하드'로 살았다. 마치 니하드 시절의 자신을 아는 누군가가 자신을 찾아올 것을 예감하듯이... 정작 그런 그를 찾아온 것은 앞으로 살아갈 평생 남을 죄책감, 되돌릴 수 없는 후회다. 나왈이 그를 '72번 창녀'로서 탓하기만 했다면, 혹은 '어머니'로서 사랑하기만 했다면 니하드는 이토록 고통스럽고 혼란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3-1. 나왈은 아부 타렉을 용서하지 않았다.

당신은 여전히 살아있다는 걸 그들을 통해 말하고파요.

영화에서 편지 직역을 보고 무슨 말인가 한참 생각했다. 아부 타렉이 니하드로 이름을 바꾸고 고문기술자의 모습을 버린 채 캐나다의 어느 수영장에서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는 남자가 되었지만, 여전히 아부 타렉으로서의 그는 살아 있음을, 아부 타렉을 기억하는 사람(나와 내 딸과 아들)이 있음을 말한다는 뜻이었나보다.


나왈과 니하드가 살아온 궤적은 상실에서 왔다. 상실은 사랑과 증오를 모두 키울 수 있는 재료다. 이름을 날리는 순교자가 되어 어머니에게 닿고자 들었던 총은 자신과 같은 처지의 아이들을 죽였고, 넘어서는 분쟁을 심화시켜 적이 어머니를 해치게 했다. 나왈이 민족주의자에 대한 증오심으로 든 총은, 아들이 패륜을 저지르게 하는 계기가 됐다. 이 사슬은 대를 이어 끊임없이 이어진다. 살인이 살인을 낳는다는 말을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장면들이다.


만약 나왈이 쌍둥이에게 미스터리한 유언을 남기지 않고 곧이곧대로 아부 타렉에 대해 말했다면, 쌍둥이가 그를 증오하고 죽이지 않았을 거라 어떻게 확신하는가? 나왈은 분노의 흐름을 끊기 위해 쌍둥이에게 과거에 대한 어떤 것도 함구했다. 분노의 흐름을 끊겠다는 약속은, 간호사가 강의 흐름에 쌍둥이를 떠내려보내지 않은 그날부터 시작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3-2. 나왈은 니하드를 사랑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널 사랑할 거야.
네가 태어났을 때 해준 약속이란다.
...
너를 내 사랑으로 감싸줄게.
기운을 내거라.
함께 있다는 건 멋진 일이니까.
너는 사랑으로 태어났어.
그러므로 네 동생들도 사랑으로 태어난 거지.
함께 있다는 건 멋진 일이란다.

너의 어머니, 나왈 마르완, 72번 죄수로부터


침묵이라는 고귀한 절단을 택한 나왈마저도, 사랑과 증오를 하나로 묶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럴 이유도 없다. 평생 나왈에게 다른 두 사람이었던 한 사람을 굳이 하나로 묶어야 할까? 아부 타렉에게는 "존재하나, 침묵하라." 니하드에게는 "나는 아부 타렉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 아니다.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하는 것이 동시에 불가능하단 말인가?


나왈이 둘을 각각 호명하기로 결심한 것은 합리적인 결단이자 자신의 삶을 감내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사랑과 증오는 하나일 수 없지만, 함께일 수는 있다.


스크린샷 2025-08-11 오후 2.54.34.png 연극 <Incendies> 대본

사실 <그을린 사랑>(Incendies)는 연극 원작을 기반으로 각색한 영화다. "함께 하는 건 멋진 일이란다.(직역: 함께하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라는 말에 대해 생각하다 연극 대본까지 찾아보게 되었는데, 연극 설정에서는 와합의 마지막 말이었다고 한다. 영화에서도 들리지 않았을 뿐 비슷했으리라 생각한다. 와합은 다가온 죽음 앞에서 나왈을 떠나지 않은 사람이니까.



4. 덧붙임: 증오의 연쇄


영화를 다 보고 이사벨 아옌데 소설 <영혼의 집>이 떠올랐다. 이 소설은 격동의 20세기 칠레에서 살아가는 집안의 3세대를 그리고 있다. 에스테반 트루에바라는 가부장적 인물은 손녀딸 알바를 무척 아끼지만, 그가 저지른 만행들은 긴 시간을 넘어 알바가 군부독재에 무참히 짓밟히는 결과를 낳는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이런 구절이 있다.

외할아버지가 강가의 갈대밭에서 그의 할머니인 판차 가르시아를 넘어뜨렸을 때 또 다른 업의 고리가 연결된 것이다. 그 후 강간당한 여자의 손자는 강간한 남자의 손녀에게 똑같은 짓을 되풀이했고, 아마도 사십 년 쯤 후에는 내 손자가 가르시아의 손녀딸을 갈대밭 사이로 넘어뜨리고 또 다른 고통과 피와 사랑의 역사가 앞으로도 몇 세기 동안 계속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알바는 지극히 당연한 복수심을 희석시키며 증오의 고리를 끊어버리는 선택을 한다. 알바는 복수하는 대신 글을 써서 트루에바 집안의 이야기를 남겼고, 나왈은 폭로하는 대신 침묵했다. (직접 보게 했다.) 전쟁과 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수많은 회고록, 적과 대화하려는 시도와 후손들의 사죄도 그런 시도의 일부분이다.


나왈과 니하드가 무슬림 정체성과 기독교인 정체성을 넘나드는 장면에서는, 전쟁터 한복판에서 형을 적군으로 만나는 <태극기 휘날리며>(2004)를 떠올렸다. 한국과 레바논은 근본적으로 다른 역사적 맥락을 지니지만, 커다란 역사적 사건에 휘말린 소시민의 비극이라는 점에서 겹쳐보인 것이다. 집단적 광기 앞에서 개인의 정체성이나 핏줄이란 얼마나 얄팍한 것인가?


사실 다른 작품을 떠올릴 것도 없다.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이 진행중이다. 가자지구 주민과 무장 세력을 동일시하고 폭격하는 이들에게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한 것도, 영상매체의 SNS 확산이 용이해진 2010년대 중반 이후이다. 그때까지 모두가 선악 프레임을 믿을만큼 순진했다. (지금은 이스라엘 내부에서도 평화를 외치며 학살하고 봉쇄하는 네타냐후 정부를 규탄하고 있다.)


국제정세란 영화의 미시적 관계처럼 간단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하는 작품이라서 <그을린 사랑>을 좋아한다. 고리를 끊는 일은 용서하는 일과 별개다. 나왈의 관용은 그가 성자여서도, 모성애가 지극해서도 아니었다. 그것이 나의 사랑하는 사람, 나의 후손을 사랑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왈은 증오를 전염하지 않는 선택을 함으로써 폭력보다 강한 용기를 보여주었다. 그 선택이야말로 다음 세대에게 남길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유산 중 하나일 것이다.






25. 8. 13. 덧붙임


SNS를 떠돌다가 우연히 이 글을 봤다.

https://blog.naver.com/evelyn1021/223923104996

'부야오' 님의 <그을린 사랑> 감상이다. 오이디푸스와 <그을린 사랑>의 구조 및 인물을 비교하는 내용, 잔느의 수학자적 면모에 대한 고찰도 좋은데, 그 뒤로 이어지는 나왈의 편지에 대한 해석을 읽고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잔느의 마지막 말 중 '너희를 달랠 시간이 왔어. 자장가를 부르며 위로해줄 시간이.'가 무엇을 뜻하는지 나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부야오 님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나왈은 지금까지 공포로 말미암아 태어난 쌍둥이에게 온전히 사랑한다고 도저히 말할 수가 없었다. 나왈이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그러나 너무나도 끔찍한 진실을 깨닫는 것은, 모든 것이 '위대한 사랑'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과 닿아 있었다. 그러므로 나왈은 드디어 아이들에게 진정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던 거라고... 아 다시 눈물이... 너무 좋았던 글이라 허락을 받고 링크를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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