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층 현관에 빼곡히 진열된 철제 우편함. 꼬깃하게 걸친 채 나를 기다리는 흰 봉투를 인양할 때는 끼익 소리가 납니다. 문학세상과 달리, 편지에는 달갑지 않은 내용들이 많습니다. 카드 명세서, 각종 세금들...
오늘도 그런 가벼운 투덜거림으로 우편함을 열었다가, 마음이 숙연해집니다. 발신인에는 얼마 전 정기검진 받은 병원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집에 와서 편지봉투를 열 때는, 검진을 받으러 갈 때만큼의 긴 호흡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작은 숨마다, 종이의 내용에 따라 달라질 방향들이 떠오릅니다.
만약, 종이에 예견된 마지막이나, 병원조차 예측하지 못한 마지막을 맞는다면... 내세가 있더라도 다시 태어나기 싫다고 친구들이 말할 때마다 조용히 마음 아파했던 나였지만, 오늘은 나의 마지막을 가정해볼까 합니다. 낯익은 얼굴들이 공기보다 더 가볍게 떠올라 마음 위로 가득합니다.
나에게 전합니다.
짧은 걸음이라 생각했거늘, 뒤돌아보니 내 스승들의 나이가 되어 여기 있습니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기 싫어, 내가 내뱉은 말들은무용하나 독성이 없습니다. 그러나 독으로 남을, 그리고 나를 지켜본 적도 적습니다. 아프기 싫어 회피당한 나의 마음에게 심심한 사과를 전합니다.
농약을 치지 않은 화원에는 잡초가 가득합니다. 그러나 내 화원에 피어난 이상, 풀들은 더 이상 잡초가 아닙니다. 그렇게 독이 없는 나의 화원에, 여러 꽃송이가 피어나 제 입김에도 까르르 웃습니다. 남들처럼 우러러보는 드높은 정원은 아니지만, 나와 눈을 맞대고 방긋 웃는 정겨운 들꽃들이 나를 반깁니다. 붉은 장미가 아니더라도, 작고 여려 가시조차 없는 들꽃은 나의 화원에 깊은 뿌리를 내려줍니다. 당신들의 부재에 나의 토양이 오래도록 썩어갈 만큼...
나는 사념에 농약을 뿌릴 만큼 강한 사람은 못되었습니다. 그렇기에 나의 딸도 나를 닮았을까 봐 매몰찬 마음을 가르쳐보기도 했지만, 결국 내 딸이었습니다.
내 화원의 자랑인 내딸... 영원히 내 밭에 남아있으면 좋겠지만, 딸에게는 내가 준 건강한 다리가 있습니다. 나에게 그러한 존재였듯, 어떠한 궂은 날씨에도 쾌적한 미소를 지켜내기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의 정원사로 살아갈 수 있어 더없이 영광이었음을 읊조립니다. 정원사는 당장 눈에 안보일지라도 바람이 되고 햇살이 되어 멀리서 너의 화원을 지킬 테니 언제나 오늘처럼 날씨로서 우리가함께 하길...
나만의 우주가 아스라이 스러지는 날, 내가 선명하게 남기고 싶은 단어와 문장은 정녕 무엇일까요.
가벼운 묵상에도, 생각이 끓어 넘쳐 결국엔 마음이 비었습니다. 그렇기에 겸허한 듯 펼쳐 읽습니다. 몇 가지의 주의점을 제외하고는 당장 병원신세질 일은 없는 새날들을 우선 받습니다.
다시 평정심이 비춰주는 일상에는 먼지조차 윤기가 흐릅니다. 오늘은 배달온 하얀 평온을 입고 귀가하는가족을꼬옥 안으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