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어느 시골 산기슭에 자리 잡은 학교도 기분좋게 소란스러워지는 가을 운동회 날. 하늘에는 만국기가 가지를 뻗어서 제 스스로 신나서 몸을 펄럭이고 있고, 나른하던 동네 나무들도 간만에 생긴 볼거리에 소식을 전할 잎새 전령을 바람에 날린다. 전령을 보내 놓고도 소식이 궁금한 나무들은 바람을 입고 옆에 나무들과 넘실넘실 키득거린다.
아무리 농사일로 바쁜 엄마여도 운동회 하는 날 만큼은 한복을 곱게 차려입으신다. 우리 엄마는 언제 오시려나...
운동회가 한창인데도 교문에 조금씩 정신이 팔리다 보면 몸빼가 아니라 단풍처럼 고운 엄마가 점심 도시락 들고 오시는 게 보인다. 엄마의 소복한 한복 치마가 고무신보다 먼저 운동장 선을 밟고 들어선다. 그 순간 나는 달리기에서 꼴찌라는 것도 까먹고 1등보다 더 신이 났다.
오전에 전령을 보낸 나무들이 답장을 받을 즈음에는, 드넓은 운동장에서 사실상 마을 잔치가 펼쳐지고 있다. 청군 백군을 응원하는 소리가 점점 크게 울려댄다. 하늘이 울리다가 멀어지도록 마구 응원하던 아이들이 서서히 지쳐갈 즈음 달리기가 시작된다. 심장 터질듯한 총소리를 뚫고 아이들은 총소리에게 바통을 받아 심장이 터지도록 소리를 지른다. 일사불란하게 달리던 친구들과 언니의 모습이 소리처럼 빠르게 지나가고 나면 계주에 아버지가 나타난다. 타원형의 운동장 선을 아슬아슬하게 넘지 않고 한쪽 팔로 바람을 휘두르며 열심히 바람처럼 달리시던 모습... 뜀박질이 끝나고도 운동회에 끝까지 머물러 우리를 응원해 주시던 아버지, 엄마 모습이 바람처럼 스친다.
그렇다. 바람처럼 스쳤다.
1년에 한 번씩 운동회가 열렸던 학교는 폐교되어, 동네의 나무는 영영 나른하게 되었다. 계속 고요해야만 하는 저 산기슭에서도 한때는 소란스럽게 운동회가 열렸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 바람처럼 달린 아버지를 기억하는 게 아이와 나무밖에 없어서, 우리는 바람에 한동안 휘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