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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 사는 까만별 Feb 18. 2024

대기전력(待機戰力)



오래 여행을 간 사람의 집은 빈집이 아니다. 먼지는 쌓일지언정, 주인은 집에 머물지 않을지언정, 주인이 오기를 기다리기 위해 기계들이 수명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대기 전력이 가득한 집은 주인이 오기를 항상 대기하고 있는 집이지, 빈집이라고 할 수는 없다.


 엄마가 병원에 입원한 지 어느새 일 년.  지금까지 가전들은 집주인을 대기하기 위해 그들끼리 적막을 지켜주었다. 이제는 가전에게 조금 긴 휴식을 줄 때이다. 엄마의 병원 신세가 길어지자 자매는 그렇게 시골에 모였다.

 고향집에 다시 오기 위해 일 년이 걸렸다. 가전에게 무기한 휴식을 준다는 것의 의미를 아무도 말하지 않으며 착잡한 공기를 가로질렀다.     


 설 연휴 끝자락에 오랜만에 다시 잡아본 현관문고리. 주인의 지문을 기다리다 지친 고리는 낯선 손길에 화들짝 서리를 비추고 사라졌다. 현관문이 열리니 먼지와 냉기가 긴급한 외출 뒤의 충격을 조금씩 끌어안고 있었다.

 안방 문을 열자 침대가 주인을 기다리다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침대 맞은편 자개장은 주인의 안녕을 기원하듯 수시로 눈을 반짝거리고, 서랍장에 올려진 당신의 찬란한 찰나가 액자에 도르르 담긴 채 주인을 기억해주고 있었다. 모든 것이 바뀌며 바뀌지 않았다. 붉은 시계는 여전히 흘러 시간을 알린다. 바뀐 것은 시계의 다이얼과, 식은 침대뿐. 안방에 들어온 모두가 어떤 말도 없이 시계의 소리만을 들었다.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엄마의 부재를 시계소리를 함께 들으며 위로받고 있었다. 자매들은 제법 힘차게 집을 정리한다.


수저 하나도 버리지 않는 절제력으로 인해 유년 시절부터 보아온 그릇엔 엄마의 손때가 가득하다. 빛바랜 물건 하나 버리지 못하던 당신의 살뜰한 손과 마음, 자식에게 다 주길 바라시곤 지금은 재활병원에서 밤마다 어떤 여행을 하고 계신 걸까.     


 가구들 중 빈 집을 지키기 위해 가장 공헌한 것은 냉장고였다. 자매는 냉장고에게 잠정적인 휴식을 주기 위해 엄마의 냉장고를 파내기 시작했다. 모든 음식을 큰 봉투에 넣고, 냉장고를 깨끗이 닦으며 칭찬해 준다. 그리고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냉장고는 빈 수납장으로 변한다. 온도를 나타내던 다이얼이 사라지고 냉장고는 조금씩 냉기를 잃으며 식어간다.     



플러그를 뽑아버린 냉장고처럼 더 이상 냉기가 사라진 당신의 보금자리.

말없이 그리움을 지펴 조금씩 기억이 옅어지는, 언젠가는 내곁을 떠날 엄마에게 미리 전언한다.     


엄마. 나를 딸로 만나줘서 정말 고마워... 엄마가 나의 엄마여서 언제나 감사하고 행복했어...     

그리고 만약에 다음 생이 존재한다면 우리 그때도 다시 만나자. 진짜 꼭 만나자...

대신 그때는 내가 엄마의 엄마로 태어날래. 평생 이쁜 옷도 못 입고 맛난 것도 양보하며 살아왔을 엄마. 엄마가 된 내가 이쁜 옷도 실컷 입히고, 맛난 음식도 실컷 먹여주고, 좋은 곳에 여행도 함께 다니며 이번 생에 못 누린 것들을 실컷 해주고 싶어. 엄마가 약한 모습도 보이고, 엄마가 투정도 부리고, 엄마가 까칠하기도 했으면 좋겠어.

언제나 자애롭기에 평생 엄마를 존경하는 거지만, 엄마가 다음엔 자애롭지 않으면 좋겠어...”     


고요한 새벽에 주인을 쓸어버린 파편만 남은 빈집. 애써 쓸고 닦은 후 다시 불을 끄고 집을 비운다. 현관문을 잠그며, 병환에 삼켜진 엄마가 다시 건강하게 귀향하실 내일 꿈을 꾼다. 이젠 냉장고 대신 자식들이 엄마의 귀향을 대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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