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구 사는 까만별 Oct 11. 2024

그 많은 신발은 기차에 잡아먹혔나

saddle the wind



 골목과 학교에서 매일 배운 ‘다시 만나자’.

 장소에 가면 매일 그 말을 지키듯 친구들이 있었지만, 역 앞에 코스모스만큼은 이 쉬운 약속이 그토록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빠앙...

기차가 기적 소리를 앞세워 머나먼 한적함을 가르며 간이역의 풍경 속으로 들어온다. 코스모스 꽃잎이 지나가는 기차를 위해 몸을 틀어 비켜주자 앳된 얼굴과 달리 꽤나 닳은 구두 두 켤레가 동동거리기 시작했다.      


 기차가 이 남자를 싣고 가버릴 거야...’

 남자의 습관 같은 침묵을 닮은 뭉툭한 군화가 동동거리는 연분홍빛 구두를 바라만 보았다. 여자의 눈시울은 구두를 닮아 에나멜처럼 붉게 반짝였고, 들썩이는 어깨를 남자가 와락 당겨 안았다. 기차가 도착하기까지 그 어떤 소리도 듣지 못한 그들은, 찰나의 포옹을 나누고서 플랫폼에서 멀어져 갔다. 남자는 홀로 기차에 올라, 창 너머 아른거리는 그녀만을 바라보았다. 중요한 순간, 이상하리만치 무용한 말들을 주고받으며 재회할 수 있다면 모든 게 다 아무래도 좋았다. 세 번의 기적소리와 함께 남자를 실은 기차는 출발했고 창밖의 그녀는 호흡이 가빠지도록 그 구두를 신고 달렸다. 플랫폼 끝에 멈춰 선 그녀는, 모래 묻은 구두 위에서 코스모스처럼 어깨를 들썩였다. 잠시 떨어져도 마음은 함께일 거라는 주문을 걸었지만, 맹세 없이는 청춘은 세상 앞에 꺾일 듯이 휘청일 운명이었다.     


 코스모스는 언제나 기차에게 길을 비켜주면서도, 자신처럼 뺨을 붉게 물들이는 승객 가득한 간이역에 뿌리를 내린 것이 후회스럽지 않았다. 매정한 기차에게 내몰리느라 줄기가 조금씩 굽어가도, 발자국 소리와 주머니에 든 사연에 소담한 이별과 만남들을 바라보다 보면 코스모스의 꽃잎은 나날이 깊은 빛깔을 내었다.


 간이역에서 따라가지 못하는 서러움을 느낀 건 비단 분홍빛 구두를 신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고무신을 신고 지평선을 바라보던 중년의 농부는 자신을 똑 닮은 아들을 수시로 바라보았다. 부모님을 더 이상 호미질 안 시키겠다고, 발을 마저 뻗으면 방문이 닿는 좁은 공간에서 공부하는 아들이 내려온 주말 해 질 녘. 바람만 잘 드나드는 빈 호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농부는 아들의 학사모를 위해서는 팔아야 할 송아지가 몇 마리일까 궁리하고 있었다. 내일이면 바리바리 싸준 찬거리를 들고 느리디 느린 기차를 타고 상경할 아이를 상상하며 거친 숨을 골랐다. 노을은 부자에게 학사모와 새 신발의 환상을 잠시 반짝여주고서 기나긴 땅거미를 드리웠다. 익숙한 기적소리가 부자의 약속을 가로질러 간이역에서 조금씩 멀어져 갔다.     


 그리고 농부보다 더 낡은 고무신 한 켤레가 역으로 들어왔다. 친정 나들이를 오랜만에 하고서 역에서 표를 사느라 바쁜 젊은 엄마 뒤로, 허리가 굽은 채로 아기를 안은 노모가 있었다. 피부에 깊게 세월을 새겨진 한복 차림의 어머니는 움푹한 눈으로 한참 동안 딸과 자신의 손주를 눈으로 새겨 넣기 시작했다. 결혼하고서 손주가 나와서야 처음으로 여기 올 수 있었던 아이들이었다. ‘출가외인이라고 하지만, 어예 가 내 딸이 아닌되겠노...’ 딸의 해산을 위해 밥을 차리고 대신 아기를 재우던 긴 밤들이 왜 이렇게 짧았나 기적소리 아래 작게 탄식했다. 어머니의 바람과 달리, 기적소리는 어김없이 밀물처럼 3번을 들이찼다. 노모는 굽어진 등으로 손주를 몇 번이고 굽어보고 피부에 새겨 넣었다. 원 없이 손을 허공에 흔들면, 흐릿해진 창문으로 손을 흔드는 뽀얀 실루엣들 사이로 쭈글한 손이 창문에 비쳤다. 딸은 이상하게도 그때 손수건으로 자기 눈을 잠시 가렸다.     


 다시 만나자는 성인들의 약속은 결연한 만큼 지키기 어려운 것이기에, 역은 이들의 재회 여부를 알 수 없다. 그렇기에 코스모스는 더더욱 기적처럼 사라지는 기차를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코스모스들이 매 가을마다 염원을 다지며 자신의 색을 예쁘게 물들였지만, 역의 페인트가 벗겨질수록 사람들은 이 간이역에서 점점 흩어졌다.     


 기차가 운행되지 않는 폐쇄된 간이역, 코스모스 군락만이 높은 하늘 아래 사람들이 무사히 도착했기를 바라며 작게 군무를 살랑인다.      

         







https://youtu.be/LW3Rd2hGHoI?si=bpCbe5atJpxGB6as













매거진의 이전글 오래전에 나는 여우 한 마리를 잃어버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