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EVERYTHING

by 지구 사는 까만별



검정 치마의 ‘everything’ 공식 뮤직 비디오를 감상한 후 영감을 얻어 쓴 글입니다.





변하지 않는 단단함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줄곧 섬세한 것을 좋아했다. 푸르른 새벽과, 초록 이파리와 붉은 나비. 섬세함을 담당하는 이러한 단어들은, 나의 마음을 깊이 헤아려 세상과 달리 상처를 주지 않는다. 오늘은 공교롭게도 세심히 영사된 꿈을 꾸었다. 푸른 새벽 아래서, 나는 소장품을 기록하는 애호가 마냥 꿈을 복기해보고자 한다.


꿈의 시작은, 깨어난 현재보다 조금 짙게 푸릇한 새벽이었다. 낯선 교외의 역에 내려 오래된 차를 몰고, 안개 자욱한 여명을 밀어내며 우거진 숲으로 들어갔다. 촉촉하게 촘촘한 새벽공기는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고, 투명한 이슬을 꿰어 둔 초록 이파리들은 사각거리는 바람에 고요히 소근거렸다.


평소 나는 사고 날 것을 대비해서 운전할 때 창문을 조금 열어두는 습관이 있다. 아무도 없을 숲이지만, 나는 그때도 무의식적으로 창문을 조금 열어두고 새벽의 공기로 에어컨을 씻어내고 있었다. 서행하며 달리던 차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한 사람의 실루엣이 갑자기 보네트 앞으로 드러났다. ‘창문을 열어두지 않았으면 사고 날 뻔했잖아!’ 놀라 숨을 고르는 자동차 앞에는 비상등처럼 빨간 옷을 입은 부드러운 그녀가 있었다. 선명한 옷을 입은 그녀는 안개에 흐려져 차 앞에서 닿을 수 없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하늘거리는 춤선은 미명 아래 선연한 불꽃같기도 하고, 붉게 처연한 코스모스를 연상하기도 했다. 마음이 그녀로 진정되자, 어둠을 긁어내어서라도 불꽃을 더 바라보고 싶었다. 그러나 불꽃은 어둠 속에서만 밝게 빛날 수 있는 법. 밝음을 추구하는 내 마음이 들키기가 무섭게 그녀는 조금씩 나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차는 진흙에 빠진 것 마냥 속도가 붙지 않아 그녀를 따라잡지 못하고, 달리는 그녀에게 겨우 닿아 이름을 부를 때쯤 툭. 나는 고꾸라져버렸다. 느린 속도로는 흐느적거리며 따라갈 수 있던 그녀가 쾌속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꿈속의 그녀는 새벽의 옷자락처럼 조금씩 아침에 녹아갔다.


조금 있다 커피를 내릴 때 즈음엔,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얼음처럼 새벽은 녹아 사라져 버릴 것이다. 나는 그런 급한 마음으로 꿈을 복기하기 시작했다.


그녀를 조우했던 푸른 새벽의 고요는 심장 소리로 소란해졌다. 푸른 새벽, 초록빛 잎사귀, 빨간 나비. 폴짝거리며 조금씩 다가오다 떠나가던 그녀. 창공으로 뻗어나가는 그녀의 가느다란 팔은 훨훨 가벼이 날았다. 내가 손목을 잡지 않았기에 나비는 날아갈 수 있었다. 날아오를 수 있는 건 분명한 기쁨이다. 쓰린 되뇜과 더불어 나비는 영원히 새벽을 난다. 그 짧은 새벽의 푸름을, 나는 청춘이라 불러 나지막이 기록한다.



내 청춘의 여름. 가을을 맞은 나는 지나간 계절로 박제되어 버린 그녀를 아프게 기억한다. 더는 보이지 않아 가장 깊고 고요한 새벽에 눈을 감고서야 안개로 찾아든 사람...

하늘하늘 춤을 추고 나비가 되어 나풀거리던 그 길목. 노스탤지어의 꽃이 사그라들고서야 봄인 줄 깨닫는 어리석음에 안개만 남아 내 마음을 오리무중으로 만들어버린다.


푸르른 새벽, 초록 이파리, 나비 같던 붉은 그녀의 춤. 진정만을 주던 섬세한 그들은 여유 넘치는 아침에도 사라져 버린다. 나의 여름이 오늘은 사라지지 않기를. 마음의 암실에 자리한 거대한 영사기가 거대한 붉은 나비의 춤을 잊히지 않을 빛으로 재생한다.

닿을 수 없는 그 춤에 나는 ‘여운’이란 이름을 붙여 오늘도 회상한다.







https://youtu.be/Aq_gsctWHtQ?si=GYls3ISKBMAOTK-l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