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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Da Capo

- ID. orgel (20대, 여)

by 지구 사는 까만별



‘포사이드... 여기가 맞나?’

약속 장소는 사면이 통유리인 카페였습니다. 차임벨이 울리자 원두 향 짙게 밴 갈색 톤의 인테리어가 만추에 물든 바깥 정원과 갈색을 기점으로 경계를 자연스레 풀어졌습니다. 경계의 구심점에서는 고삐 풀린 듯 낙하하는 플라타너스 낙엽들이 조각씩 떨어져 구르다 날기를 반복하며 가을의 에너지를 함축했습니다. 두리번거리고 있으니, 한 남성이 조용히 손을 들어 나와 눈을 마주쳤습니다.

15분 정도 지났을까요. 첼로를 전공한다는 낯선 남자의 길다란 손가락에 머그잔이 쥐어졌습니다. 아메리카노가 뜨거운 입김을 대신 내뿜고 있었어요. 사실 과 선배가 권해준 소개팅을 수락할 때만 해도 썩 내키지는 않았습니다. 과 선배의 지인이라면 나쁜 사람은 아니겠지만 나는 타인과 동행하는데 재능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요. 나는 음악을 전공하며 가급적 독주만 해왔고, 교수님도 나에게서 시너지라는 재능을 뽑아내기는 힘들다는 뉘양스의 말을 하곤 했었습니다. 언제나 혼자만의 루틴이 있었고, 외로움에 불편함을 느껴본 적은 없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첼리스트인데 너랑 맞을지도 모르겠어.”

선배는 어느날 갑자기 한 첼리스트의 독주회 팜플랫을 주며 만남을 제안했습니다. 두 솔리스트의 만남이라... 심심했던 선배의 변덕일지, 외골수를 알아본 선배의 혜안일지 알 턱이 없었습니다. 선배는 짖궂기는 해도 악인이라 하긴 힘든 사람입니다. 나는 연습실에 들어가서 과제 지정곡을 연습하기 시작했습니다. 여태껏 문제되지 않았던 부분에서 소리가 거슬렸습니다. 계속 연습을 해보아도, 손을 바르게 해도 이 부분에서만 조율되지 않은 것처럼 신경이 튀었습니다. 신경이 쓰이는 탓이리라. 만나서 끓어넘치든 미지근하게 식든 일단 부딪혀야겠습니다. 나는 연습실을 나와 선배에게 소개팅에 가겠노라 전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습니다.


아메리카노로 목을 축인 후, 다소 긴장한 그는 여백의 시공을 흔들었습니다.

피아노를 전공하신다고요? 제 친구에게 들으셨겠지만 저는 첼로를 배우고 있습니다.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네 반갑습니다. 선배와 친구셨군요.”

그의 얼굴에서 화색이 돌았다.

“아 맞습니다. K와는 한 때 트리오를 했었습니다. K는 합주에 관심이 많다 보니, 제게 선뜻 트리오를 제안해주었습니다. 방향이 달라 저는 나갔지만,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나는 K선배를 짖궂다고 생각했지만, K선배의 짖궂음 또한 선배의 사교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K선배가 속해있는 트리오는 인지도를 넓히고 있습니다. 내게 소개해 준 걸 보면 그와 K선배가 좋게 헤어진 것은 사실인 모양입니다.

그럼 요즘은 어떻게 지내세요?”

그는 잔을 내려놓았습니다.

음대생이 다 같죠 뭐. 학교 갔다가 연습실 갔다가 레슨 갔다가 집으로 귀가하죠. 어젠 연습이 잘 안돼서 산책이라도 할까 하다가도 연습실 밖을 못 나가겠더라고요. 결국 시간 다 채워서 레슨하러 갔네요.”

“네... 저도 그래요. 일상의 흐름이 깨지면 적응이 잘 안 돼요. 악보 위를 자유로이 표현하려면 나의 변칙은 다 숨죽이게 해야 해요. 연습실에만 살다 보면 점점 세상과는 엇박이 되고, 나는 반복된 삶을 살고 있고, 음악만이 하루하루 소생해요. 그렇게 완전히 부활한 연주회를 끝내고나면, 저는 계절에 상관없이 며칠 방에서 동면을 맞이해요.”

그는 고개를 숙였고 읊조렸습니다.

“맞아요 나도... 저도 무수한 엇박을 연주하지만, 메트로놈 밖으로 나갈 수가 없어요.”


카페 내부에 철썩철썩 밀려들어 어느 순간 말러의 교향곡 5번 올림 다단조 4악장이 공간을 찰박하게 채워지고 있었습니다. 만조의 여유로운 시선으로 유리 너머의 투명한 가을을 함께 바라봤습니다. 손끝을 파고드는 긴장감, 꿈에서도 완벽하지 못하는 나의 연주, 규격 맞춘 자유를 위해 손가락을 움직이는 전쟁 같은 콩쿠르... 우리는 엇박을 표현하기 위해 하루의 정박 속을 나올 수 없습니다. 나의 맞은편에 앉은 첼리스트도 순간의 아름다움을 위해 끝없이 현을 멈추지 못하고 아슬하게 살아가겠지요.

우리는 해가 지도록 공감대에 걸린 소소한 것들로 고개를 끄덕이며 카페에 있었습니다. 지금껏 전깃줄에 걸려있던 연주와 공연 생각이 바람에 실린 플라타너스마냥 카페 밖에서 날아오르기를 반복했습니다.


귀가하는 차에 오르자, 자동 재생되는 지정곡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c단조가 새로이 저벅저벅 다가섰습니다. 나는 다시금 차 조수석에 붙어있는 어릴 적 내 콩쿠르 사진을 쳐다보았습니다. 내 마음에 가을에 불어오는 산들바람 같기도 한, 힘차게 시작하는 피아노 건반 뒤로 현악기가 웅장하게 이끌어주고 있었습니다. 창틈으로 음계를 실은 바람이 비집고 들어와 스산한 내 볼을 어루만졌습니다. 정박 속에서도 여러 악기와 화음을 낼 수 있다면, 갇혀있다 여길 이유는 줄어들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시동을 걸어 야간 연습을 위해 연습실로 향했습니다. 백미러를 보자, 공연장에서 대상을 받고도 외로웠던 드레스 입은 소녀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며 점점 작아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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