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중을 기다리며

by 지구 사는 까만별



“엄마, 지내고 있어. 또 내려올게.”

오야. 우리 신경 쓰지 말고 니나 잘 지내마 된데이.”


이파리가 거의 다 떨어진 앙상한 감나무 아래서 희끗한 노부부가 여남은 이파리 따위 신경 쓰지 않은 채 자식을 향해 힘껏 손을 흔들었다. 주말에 찾아든 자식과 하룻밤 회포를 꿈꾸듯 눈을 다시 뜨면, 다시 날갯짓을 파닥거리는 새끼들을 말없이 바라보시던 부모님이 계셨다.

배웅이 있다면 마중도 늘 있었다.

고향을 내려간다는 전언 한 마디에 시외버스 정류장까지 오토바이를 타고 나와계시던 아버지. 그리고 집마당 가마솥에서 엄마가 일으킨 열기에 못 이겨 빠져나온 골부리국은 동네 어귀까지 마중을 나왔다. 사시사철 짙푸른 고향 속에서의 마중과 배웅은 그렇게도 변함이 없더니, 고향집 벽시계처럼 결국은 서서히 빛바랬다. 오토바이의 시동이 꺼지고, 아궁이의 불이 켜지지 않고, 성실한 부모님을 닮은 커다란 벽시계는 병상에서 돌아오지 않는 집주인을 기다리다 서서히 침잠되었으리라.

살이 찢기는 산고로 자식을 맞이하고서, 대가 없이 아이들을 거뜬히 키우고, 자라서 떠나보낼 때까지 겨우 눈만 붉히던 엄마...

엄마의 속은 붉어진 눈시울 정도로 해소가 되는 깊이였을까? 중년에서 할머니가 되기까지 엄마의 깊은 침묵만 남은 지금, 나는 나의 파도를 어떻게 퍼내야 하는 걸까. 소용돌이는 빠져나가지 못하고 순환할 뿐이다. 엄마도 그랬을까?

깊은 호수 같던 엄마에게 마중과 배웅을 받고 자란 나도 살이 찢기며 한 아이를 만났다. 내 피와 살로 이뤄진 아기를 나도 기꺼이 맞고 기쁘게 키웠다. 세월이 흘러 다 자란 아이가 날갯짓하며 내 앞에서 날아오르는 풍경을 자주 마중하고 배웅하는 요즘, 빛바랜 고향집 대문에 오래 서성이던 중년의 엄마가 자꾸만 포개진다.


고향집 대문처럼 내 마음에도 바람과 햇살이 드나들 작은 문이 있었고, 내 아이도 과거의 나처럼 문 사이를 넘나들었다. 어린이집과 유치원을 통해 조금씩 세상의 공기를 마시더니 학교 입학하며 바깥세상에 머무는 시간이 눈에 띄게 늘었다. 아이가 길을 잃을까 염려하며 문 앞을 지키며 서성였지만 아이는 내 염려와 달리 세상에 잘 물들어갔다.

세상이라는 공기에 적응하는 데에 나의 염려는 별 도움 안 되는 것을 느끼곤, 아이가 내 품을 벗어날 때마다 기도를 입혀주기로 했다. 나완 비교도 안되게 많은 산고를 겪어 배웅과 마중이 잦았을 엄마가 생각날 때면 나는 엄마의 마음에서 삭혔을 그 우렁찬 침묵들이 듣고 싶어졌다. 교본으로 삼고 싶은 마음조차 감히 들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지금 시점의 나라면 엄마를 청진할 수 있을까 싶어서...

자식을 믿고 기다려주는 곳, 그리고 언제든 푸드덕 날아와 햇살과 바람처럼 쉬어가는 곳이 고향이고 부모의 품일 것이다. 동구 밖까지 마중 나오던 가마솥의 구수함이 중년의 찌뿌듯한 주름살을 흐물흐물 옅어지게 하는 오늘, 나는 엄마의 시간 속으로 거닌다. 언제나 말을 아끼던 엄마는 지친 모든 날개들을 기꺼이 마중했을 것이다. 그리고 유예라는 말을 아끼며 힘차게 배웅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다음 마중이 도래할 때까지 오래도록 자신의 파도소리를 삭이며 기다렸을 것이다.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느라 지친 어깨의 아이가 잠시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서투른 솜씨로 당신에게서 배운 마중으로 젖은 어깻죽지를 너끈히 품는다.